그림 박순철
“그 일은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지금 한왕의 부모 되는 태공(太公) 내외와 그 처자가 모두 사로잡혀 패왕의 진중에 갇혀 있습니다. 자신의 부모처자를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처지에 어찌 남의 부모와 처자를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그와 같은 항타의 말은 위표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이를 악물어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군사를 무원(武垣) 쪽으로 돌렸다.
위표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무원으로 달아났다는 걸 한신이 들은 것은 곡양을 나와서도 한나절이나 지난 뒤였다. 한신은 곧 날랜 말을 탄 군사를 조참에게 보내 이르게 했다.
이에 조참이 먼저 무원으로 가서 위표가 오기를 기다리고, 그런 위표 뒤를 한신이 쫓으니 위표는 마치 몰이꾼에게 몰리는 사냥감 같은 꼴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해
무원에만 가면 당장 무슨 큰 수가 나는 듯 지름길로 내달았다.
그런데 위표가 미처 무원에 이르기도 전이었다. 한군데 야트막한 언덕사이를 지나는데 요란한 북소리와 함성에 이어 한 갈래 대군이 쏟아져 나와 길을 막았다. 위표가 놀란 눈으로 살펴보니 난데없는 한군의 깃발과 복색이었다. 한 장수가 달려 나와 길을 막으며 꾸짖었다.
“위표는 어디로 달아나는가?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위표의 눈에 익은 그 장수는 다름 아닌 조참이었다. 위표가 악에 바쳐 창을 꼬나들며 맞받았다.
“내 뜻은 이미 역이기((력,역)食其) 노인에게 전했으니, 순순히 길이나 열어라. 나는 돌아가 조상의 땅을 지킬 뿐 더는 오만하고 무례한 한왕의 종노릇은 하지 않을 것이다. 길을 열지 않으면 힘을 다해 뚫고 나갈 따름이다!”
그러자 조참이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부모처자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조상의 땅을 어떻게 지키겠느냐? 네 늙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이 모두 여기 있으니 그들을 살리고 싶으면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내 듣기로 천하를 다투려는 사람은 남의 부모와 처자를 볼모로 삼지 않는다 했다. 한왕이 너를 시켜 내 부모와 처자를 해친다면, 패왕에게 잡혀가 있는 한왕의 부모처자는 또 어찌 되겠느냐?”
위표가 그래도 기죽지 않고 그렇게 악을 쓰며 버텼다. 조참도 위표의 말을 듣고 보니 당장은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려는데 이번에는 위군(魏軍) 뒤쪽에서 부연 먼지와 함께 크게 함성이 일었다.
“이놈 위표야, 이제는 한신 대장군까지 내 등 뒤에 이르셨다. 그런데 아직도 내 처지를 모르고 발악을 하느냐? 우리 대왕께 아직 너를 아끼는 마음이 남아있을 때 어서 항복하여 목숨이라도 건져라.”
때마침 이른 한신의 대군을 알아본 조참이 위표를 보고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위표는 몰릴수록 악에 바쳐 뻗대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