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반세기, 1995년 11월이었다. 동아일보 도쿄지국장이던 나는 “에토 다카미 (일본) 총무청 장관이 3주 전 한국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고, 이동관 특파원과 취재에 들어갔다. 에토가 자국 기자들에게 “일본은 식민시대에 한국에 좋은 일도 했다”며 ‘공헌 사례’를 훈육하듯 늘어놓았음이 드러났다. 일본 언론의 침묵으로 덮어졌던 사실이 본보 보도로 공개됐다.
파장은 컸다. 김영삼 정부는 강경했고, 일본 정부는 진사(陳謝)로 넘기려다 어려워지자 보도 5일 뒤 장관을 경질했다. 마침 에토 사임 다음 날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김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이번에는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쳐놓겠다”고 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일본은 고쳐지지 않았다. 변하기는 했지만 거꾸로 변했다. 우익세력은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더욱 광범위하게 역사를 날조하고 집권당과 내각의 주류까지 응원을 서슴지 않는다. 그 산물의 하나가 4년 전의 초판보다도 개악된 후소샤(扶桑社)판 역사교과서다. 독도에 대해서도 주한(駐韓) 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세계 보도진을 향해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는 분명히 일본 땅”이라고 말하고, 지방 현(縣)은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지방이 하는 일이라 간섭할 수 없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3·1절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어조를 높이자 “한국의 국내 사정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받아친 사람이 일본 총리다.
▼거꾸로 가는 日, 건망증 심한 韓▼
이 마당에 엉뚱한 생각 하나가 겹쳐 떠오른다. 역대 한국 정부는 오일 쇼크가 닥칠 때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의 한(恨)을 풀어 보겠다는 듯이 요란하게 대책을 내놓곤 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마련한 비상 처방과 장기 해법이 줄줄이 발표됐다. 언젠가는 에너지정책을 전담하는 동력자원부를 따로 두기도 했다. 그러나 석유 충격에 약한 경제구조와 국가 체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숨 돌리면 둔해지고 시간 지나면 잊어버리는 습성(習性)에다 자리만 떠나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위정자 풍토에서는 별로 달라질 게 없었다.
우리는 일본의 영토 도발, 역사 왜곡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흥분하고 성만 낸다고 우리가 원하는 답을 일본으로부터 얻어낼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는다. 자학(自虐)이나 패배의식 때문이 아니다. 경험에 비추어 보고 한일을 둘러싼 현실과 국제 상황을 뜯어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는 중국으로부터도 ‘고구려사 치욕’을 당하고 있다. 중국 외교관이 “한국 주도의 통일을 중국은 바라지 않는다”는 공언까지 한다. 정말 고약하지만 10년 전 에토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일합방은) 당시 한국이 약해서 당했던 것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었느냐.”
지금 우리 정부엔 일본이나 중국을 함께 꾸짖어 줄 친구 나라도 없어 보인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난달 업데이트한 연감자료 가운데 독도 부분은 한국보다 일본 주장에 가깝다. 일본도, 중국도 누울 자리 보며 발 뻗지 않나 싶다. 자기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한국이 화내더라도 잠시 관망하며 버티면 된다는 셈법인지도 모르겠다. 민족 공조를 들고 나온다고 북이 도움될 리도 없다.
▼국력의 패자부활戰 신발 끈 매자▼
우선 오일 쇼크 대책처럼 잠시 물 끓듯 하다가 금세 냄비 둔 자리마저 잊어버리는 그런 정부와 국민으로는 역사 대응도, 독도 대응도 아득하다. 길게 봐야 한다. 멀고 힘겹지만 국력의 패자부활전에 나서야 한다. ‘쓰레기’ 소리를 듣던 한국 전자제품이 소니를 제치고, 삼성전자 LG전자가 세계 최대 정보통신박람회 ‘세빗 2005’를 휩쓰는 걸 보면 희망이 있다. 대통령의 경쟁력, 정부의 경쟁력, 기업의 경쟁력, 노동자의 경쟁력, 국민의 경쟁력을 각자 세계 1등으로 끌어올리는 데 혼(魂)을 불어넣는다면 기적도 현실이 될 수 있다. 분노의 단칸방에만 갇혀 있지 말고 분발의 넓은 방으로 나와야 한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