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사진학과가 개설된 많은 대학에서 신입생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절대 학생 수가 감소하기는 다른 학과도 마찬가지이지만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사진학과의 성장이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터라 실망이 더욱 큰 모양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사진적 양상’은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이다. 디지털 이미지 생산 방식이 사진을 대체하기 시작한 후 온 국민이 사진가라도 되겠다는 듯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디지털카메라로든 카메라폰으로든 말이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정작 사진학과에는 학생들이 모이지 않는 것일까. 이는 요즘 사진이 디지털 방식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이제 디지털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삶의 문화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문화 현상 중 가장 강력하게 우리 곁을 배회하고 있는 것은 역시 점차 문자를 대신해 사용하고 있는 ‘디지털 이미지(Digi-graphy)’다. 빌렘 프루서가 구획한 것처럼 기원전 2000년에 만들어진 선형(線形)의 문자를 19세기 초반에 기술적인 영상이 대체하기 시작한 이래 형상(形像)·이미지의 무지막지한 사용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디지털 이미지가 확산되기 이전까지 기술적인 영상은 우리의 몸을 좀 더 많이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촬영을 하고 현상을 하고 다시 인화하는 과정을 통해 ‘사진술’은 화학과 만나 의미를 내포한 ‘사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디지털 이미지 생산에는 현상과 정착이라는 중간의 개입 과정이 사라졌다. 처리의 속도가 빨라졌고 생산이 손쉬워졌다. 이 때문에 사진을 제작하던 암실이 사라져 가고, 동시에 사진 산업의 한 부분이 붕괴되어 가고 있다.
일부 대학에서는 암실을 폐쇄하고 컴퓨터를 들여놓고 학생들에게 소프트웨어를 가르치며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지금 부메랑이 되어 그 대학을 괴롭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디지털 매체를 다루는 방식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다가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디지털 방식은 그 근간을 당연히 대중화에 두고 있다. 다루기 쉬워지는 매체 방식에 노력과 시간을 투자할 리가 만무하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학교에 가서 배울 턱이 없는 것이다.
일본의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말했다. “풍경이란 하나의 인식 틀이며, 일단 풍경이 성립되면 곧 그 기원은 잊혀져 버린다.” 그 말처럼 디지털이 가져다준 작금의 풍경은 ‘디지털이 무엇인가’ 하는 기원과 역사성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그머니 감추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디지털은 수를 꼽는 우리의 손가락을 뜻한다. 옛날 아라비아 상인들이 손가락으로 0에서 9까지의 수를 셀 때 쓰던 디지트(digit)라는 말이 기원이다.
오늘날 그 디지털이 우리의 빛나는 미래 건설의 걸림돌을 일거에 제거해 줄 마술적 능력을 가진 매체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디지털은 있음과 없음, 혹은 어떤 지점과 지점의 위치 결정이 다른 어떤 매체보다 탁월하다. 그런데 이 디지털이 어떻게 ‘경계를 확산시키고 해체시킨다’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광범위한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과연 디지털은 이 시대,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줄 매체인가. 우리는 디지털을 과잉 탐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주하 사진가·백제예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