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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밀물과 썰물

입력 | 2005-03-15 18:20:00

그림 박순철


마읍(馬邑)은 벌써 어제 낮에 한군(漢軍)에게 떨어지고, 저희들은 도중에 복병을 만나 열에 아홉은 적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었습니다.”

그 말에 놀란 하열은 급히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앞일을 의논하려 했다. 그런데 미처 장수들이 다 모이기도 전에 또 다시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한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평성을 에워쌀 것입니다.”

성을 나가 인근을 돌아보고 있던 관원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쫓겨 들어와 알렸다. 하열이 장수들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가 보니 벌써 서남쪽 하늘로 허옇게 먼지가 치솟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의논이고 뭐고 겨를이 없었다. 먼저 성문부터 굳게 걸어 잠그게 하고 군민(軍民)들을 성벽 위로 끌어내 한군의 공성(攻城)에 대비하게 했다.

오래잖아 한나라 대군이 평성에 이르렀다. 대강 진세를 펼친 뒤에 장이가 성문 쪽으로 말을 몰아가 문루(門樓)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하열은 어디 있느냐? 옛 주인 장이가 왔으니 어서 얼굴을 내밀라 하여라.”

그러자 마침 문루에 나와 있던 하열이 성가퀴 쪽으로 몸을 내밀며 장이의 말을 받았다.

“하열은 여기 있으나 너같이 의리부동하고 반복무쌍한 자를 주인으로 섬긴 적은 없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느냐?”

하열이 원래 그리 당찬 위인이 못되었으나, 상대가 장이인 것을 알아보고 오기로 그렇게 뻗대었다. 이기고 지는 것에 따라 삶과 죽음이 정해질 뿐, 달리 피해갈 길은 없다고 여긴 탓이었다. 장이가 애써 숨결을 가다듬고 달래듯 말했다.

“내가 조나라 상국일 때 너는 나의 수하 장수로 싸운 적이 있고, 또 나는 한때 상산왕으로서 네가 나고 자란 땅을 다스린 적이 있다. 너의 옛 주인이라 하여 아니 될 게 무엇이겠느냐? 네가 진여를 따라 나를 죽을 곳으로 몰아넣은 죄가 크나, 우리 대장군의 엄명을 받들어 특히 네게 권한다. 이제 10만 대군이 대(代) 땅에 이르러 마읍을 하루 만에 우려 빼고 다시 평성을 에워쌌으니 그만 항복하는 것이 어떠냐? 버마재비가 수레바퀴에 맞서듯[당랑거철] 부질없는 고집으로 외로운 성을 믿고 왕사(王師)에 맞서다가 성이 깨어지는 날이면, 옥과 돌이 함께 불타듯[玉石俱焚] 너희는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또 원해서 그리됐다 쳐도, 저 성안의 숱한 죄 없는 창생의 목숨은 실로 너무도 가엽지 아니하냐?”

거기까지 듣자 병법에 밝지 못한 하열도 장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았다. 성안의 군민이 함께 듣고 마음이 흔들릴까봐 얼른 곁에 있는 궁사의 활과 화살을 빼앗았다.

“홀로 왕 노릇 하자고 십여 년 생사를 함께한 지기(知己)를 하루아침에 저버린 교활 무쌍한 놈아. 네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나타나 더러운 혓바닥을 놀리는 것이냐?”

하열이 그렇게 소리치며 화살 한대를 날렸다. 장이가 몸을 틀어 화살을 피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 저만치서 보고 있던 한신이 장이를 말렸다.

“상산왕께서는 이만 물러서시오. 보기에 말로 달래서 들을 위인 같지 않소.”

그리고 장이가 가까이 오자 나지막한 소리로 덧붙였다.

“하열은 늦어도 내일이면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이오. 그때는 상산왕에게 처분을 맡길 테니 잠시 분을 가라앉히시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