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침해와 교과서 왜곡 문제가 직접적 원인이고, 일본사회의 우경화가 그 배경이다. 하지만 그 저류에는 한미일 공조의 표류와 동북아지역의 내셔널리즘 분출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악화되는 한일관계를 풀려면 독도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시각에서 한미일 공조와 동북아의 갈등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도와 한미일 공조=최근 일본에 체류했던 정부의 한 관계자는 “한미일 관계에서 한국이 급속히 소외되고 있다. 미일관계는 더욱 강화되고 있고,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진다는 의구심이 커지면서 상태가 더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 내 강경 분위기 때문에 외교관들도 이 같은 실상을 국내에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부연했다.
국회 내 대표적 일본통인 민주당 이낙연(李洛淵) 의원도 “한미일 외교 축이 동요 속에 빠지면서 대북문제와 한미일 관계가 총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며 “전통적인 한미일 공조관계가 흔들리고 한국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한일 갈등이 더 증폭된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과거 한미일 3국이 중국, 북한 등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견고한 공조를 유지하던 시절엔 일본이 주요 현안과 관련해 한국 측 입장을 나름대로 배려한 측면이 있지만 최근엔 한국이 자주적 입장을 표방함에 따라 더 이상 과거처럼 한국을 의식하지 않게 됐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의 정치인이나 학자들은 “한국은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교과서 왜곡 문제에 맞서 투쟁 중인 일본의 대표적 진보인사로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워크21’ 사무국장인 다와라 요시후미(俵義文) 씨의 발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는 “한국은 북한에는 물렁하고, 미국에는 엄격하고, 일본에는 일부러 나쁘게 하려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도 일본 사회에서는 소수다. 한국이 격하게 나오면 일본 내 무당파 중간층이 돌아선다”고 우려했다.
일본 내 대표적 지한(知韓)파로 분류되는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대 교수도 최근 한국 측 지인과 만나 “일본 지식인 사회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포기한 것 같다.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우려를 표시했다는 후문이다.
미국 내에선 북핵문제와 관련해 대화론을 주장했던 민주당마저 강경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9일 김원기(金元基) 국회의장이 미국에서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과 만났을 때 배석했던 민주당 톰 랜토스 하원의원은 “한국이 미국 쪽에 서지 않으면 북한은 리비아가 될 수 없다”고 충고했다.
▽내셔널리즘의 각축장=최근 동북아는 내셔널리즘의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일본은 우경화의 깃발 아래 ‘군사대국의 길’로 치닫고 있다. 중국은 ‘반국가분열법’을 통과시키고, 대만의 독립을 지원할 경우 미국과의 대결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일본과 중국의 내셔널리즘은 경제성장에 따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북한은 이미 오래전부터 ‘김일성민족’임을 표방하며 폐쇄적인 내셔널리즘을 추구해왔다.
미국은 민족주의로는 볼 수 없지만 신보수주의(네오콘)가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내셔널리즘의 고조는 국가 간 갈등을 증폭시킨다. 미국과 중국은 양안(兩岸) 정책을 놓고, 중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주도권과 센카쿠(尖閣) 열도 문제로, 일본과 러시아는 쿠릴열도 및 북방 4개 섬 반환문제로, 북한과 일본은 일본인납치사건 문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한국에서도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민족주의가 주요 정책에 투영되고 있다.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이나 현대사의 재해석, 한일외교문서 공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요구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 임채정(林采正) 의장은 “우리는 원치 않는 전쟁을 막기 위한 방어적 민족주의”라며 “미국이나 일본의 내셔널리즘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尹德敏) 교수는 “영토 문제는 감정적 이슈고, 유럽의 경우도 섬을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다반사”라며 “치열하게 싸워야 하나 전반적인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윤영찬 기자 yyc11@donga.com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