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의 강재섭(姜在涉) 원내대표는 나에게 불편한 기억 하나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월계수’라는, 지금의 ‘386’보다 훨씬 셌던 노태우 정부의 실세그룹에 대해 기사를 쓸 적에 그를 ‘월계수 일파’라고 한 적이 있다. 그는 발끈했다. ‘월계수’ 소리가 듣기 싫은 데다 ‘일파’라는 말도 비하라고 느낀 것 같다.
그런 저런 이유로, 그는 내가 십수 년 전부터 ‘TK의 꿈나무’ 중 첫손가락에 그를 꼽아온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이만섭 김윤환(작고) 씨 같은 대구경북 분들과 TK 인물난(難)을 화제 삼을 때마다 나는 서슴없이 강재섭을 꼽았다.
강재섭 주(株)를 주목한 이유는 이렇다. 숱한 선배 TK 정치인이 있었지만, 내 눈에는 거의가 수혜자 상속자 재산가 정상(政商)형일 뿐이다. 정객들이 어쩐지 지연 혈연 같은 연줄 덕을 크게 본 것만 같다. 박정희 이래 3대에 걸쳐 30년 정권을 잡았으면서도 반듯한 인걸을 내세우지 못한 채 이회창을 앞세워 대리전을 치른 건 이런 ‘온실 체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시혜(施惠)보다 수혜자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자수성가형에 인간미도▼
그들에 비하면 강재섭은 고교 동기생 360명 가운데 공부도 교유도 걸출했고, 사법시험도 재학 중에 합격한 당당한 자립형이다. 광복 이후 세대이고 정상적인 학습 환경에서 배운 편이다. 그는 수재들의 한계인 ‘사람과의 불화’를 피한다. 그의 친구들도 ‘재승박덕(才勝薄德)’의 박덕이라고 하는 말이 강재섭에게는 안 맞는다고 한다. 파일을 보니 그는 존경하는 인물로 ‘김용대 선생님’이라는 초등학교 은사를 꼽고 있다. 좌우명은 ‘바다는 강물을 골라 받지 않는다(大海不擇細流)’라고 한다.
이런 사람이 다가오는 새 시대에는 맞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는 늘 카리스마의 결여가 약점으로 지적된다. 성격 밝고 주변을 유쾌하게 해 주지만, 결정적인 대목에서 뒷심이 무르다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 점이야말로 거꾸로 강재섭의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3대의 군사정권이 상징하는 카리스마 이미지의 후계자가 아니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2대에 걸친 야당 생활에도 그리 찌들리고 울혈 맺힌 투사가 아니다.
한나라당 자체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사공들의 집단이 되었다. 군대 감방 산악회 부잣집, 머리띠(노동계) 출신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의원들이 카리스마에 제압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TK 투톱을 이루는 것이 지역당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는 있겠으나, 결국 투톱의 비(非)카리스마로 통합을 이루어내는 것이 과제가 된다고 본다.
이제 그는 시험대에 올랐다. 텃밭에서 5선을 가꾸어온 지난날과는 판이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행정도시법안이 국회에서 처리된 이후 한나라당의 내분은 폭발 직전이다. 각목만 안 들었지, 굶고 울고 사퇴하고, 박근혜 지도부를 향해 국적(國賊)처럼 삿대질하는 게 옛 야당의 내분 못지않다. 당내에서조차 “포퓰리스트 노무현을 뺨칠 정도의 포퓰리스트들이 한나라 안에 있다”는 자조도 나온다.
▼수습과 타개의 능력 보일지▼
강 대표는 생산적인 정당을 말하고 ‘여의도 용광로’ ‘염창동 제철소’ 같은 표현도 한다. 박정희 이래 3대 정권의 공적과 원죄와 새 시대의 분화된 다기한 과제들을 고스란히 떠안은 그가 제 몫을 해낼 것인가. 그도 꿈나무에서 보스가 되어 버린 지금, 그의 정치적 성패는 출신지역과 야당의 성패가 될 것이다. ‘황성옛터’에 새 풀이 돋고 나뭇잎이 피어날 것인지, 아니면 월색만 고요한 처량한 노랫가락이 되풀이되고 말지는 그의 행보에 달려 있다.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