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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밀물과 썰물

입력 | 2005-03-17 18:31:00

그림 박순철


“남문 쪽에 다시 적의 원병이 이르렀습니다. 3만이 넘어 뵈는 대군입니다.”

그 말에 하열이 성벽 위로 올라가 보니 정말로 자옥한 먼지와 함께 한 떼의 인마가 남쪽에서 달려와 적의 중군으로 들고 있었다. 든든한 성만 믿고 있던 하열은 그걸 보자 으스스해졌다. 이미 성을 에워싸고 있는 대군만도 10만은 넘어 보이는데 다시 원병이 3만이나 보태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한신은 그날도 평성을 들이치지 않았다. 군사들을 몰아 연신 성벽 위로 기어오를 듯 소란을 떨게 하면서도 정작 날이 저물도록 화살 한대 날리지 않았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첫날밤처럼 불빛과 소리로만 겁을 줄 뿐 역시 야습 한번 없었다.

이틀 밤을 뜬눈으로 새운 하열은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한신이 허장성세만 부리고 성을 들이치지 않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 있다. 단숨에 이 성을 우려 뺄 무언가를 믿고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한신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는데, 그날 아침 다시 전날보다 많은 대군이 한신의 진채에 이르렀다. 연이틀 한군의 원병(援兵)이 이르자 하열도 비로소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나름으로 머리를 쥐어짜 그 까닭을 추측해 보았다.

(한나라가 형양에서 전단(戰端)을 거두고 이곳에다 모든 힘을 집중하는구나. 전력을 쏟아부어 우리 대나라뿐만 아니라 조(趙) 연(燕) 제(齊)를 모두 거두어 놓고 패왕과 결판을 내려는 심산이겠지. 그렇다면 지금 한신이 기다리는 것은 틀림없이 한왕이 이끌고 올 한나라의 주력군이다. 지난번 팽성으로 밀고 내려갈 때만 해도 56만이나 되는 대군을 끌어 모은 한나라가 아닌가.)

이윽고 그런 지레 짐작이 든 하열은 그때부터 제풀에 겁을 먹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진여의 원병이 이를 때까지 평성에서 버텨 보리라던 뱃심은 사라지고, 한왕이 대군을 이끌고 오기 전에 평성에서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제딴에는 성을 빠져나갈 길과 때를 찾는다고 성밖 한군의 움직임을 눈여겨 살폈다.

하열이 네 문루(門樓)를 돌며 바라보니, 한군은 성을 에워싸고 있다고 해도 방향마다 그 두터움과 엷음이 달랐다. 조나라로 돌아가는 길목이 되는 동쪽이나 위나라로 빠지는 남쪽은 진세가 두텁게 펼쳐져 있었으나, 서북쪽은 엷어 보였다. 들리는 함성과 보이는 기치도 그랬다. 서북쪽으로는 한군의 함성도 작고 기치도 많지 않아 보였다.

밤이 되자 한군의 그와 같은 배치는 더욱 뚜렷이 느껴졌다. 동남쪽은 횃불과 화톳불이 대낮처럼 밝은 데 비해 서북쪽은 새벽 별빛처럼이나 희미했다. 함성이나 북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금방이라도 치고들 듯 소란한 동남쪽에 비해 서북쪽은 그저 인마가 에워싸고 있다는 시늉만 냈다.

(당연하지. 이왕에 성을 에워쌌는데, 조나라로 돌아갈 길을 허술하게 열어둘 까닭은 없지. 남쪽은 인마와 치중이 이르는 길이니 두텁게 지켜야 하고……)

다시 그렇게 지레 짐작한 하열은 더욱 겁에 질렸다. 이제는 평성을 지킨다는 생각보다는 제 한 몸 무사히 빠져 나가는 일이 급해졌다. 이에 하열은 한밤중에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