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별다른 놀이가 없었던 우리에게 보자기는 참으로 요긴한 물건이었다. 목에 걸면 슈퍼맨이 되었고, 허리에 두르면 하늘하늘한 긴 치마요, 머리에 두르면 늘 기르고 싶어 했던 삼단 같은 긴 머리의 가발을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 시절 우린 보자기를 두르고 가끔은 아라비아 공주가 되기도 했고, 슈퍼맨이 되기도 했다. 특히 남동생에게는 독특한 기억이 있었는데 보자기를 둘러쓰고 슈퍼맨이 되어 장독대에서 뛰어 내린 사연이다. 그 결과 뇌수술이라는 전대미문의 큰 사건을 겪기도 했지만 그만큼 보자기는 나에게 특별한 기억을 주곤 했다.
특히 보자기에 얽힌 사연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머리를 자르기 위해 목에 둘렀을 때였다. 간절히 긴 머리를 기르고자 했던 우리 세 자매(언니와 나는 연년생이고 여동생은 나와 두 살 차이다)에겐 아주 괴로운 날이었다. 울고불고 아무리 떼를 써도 어머니는 단호하게 우리를 마당에 둘러 세워 놓고 보자기를 하나씩 목에 씌운 뒤 아주 짧은 단발머리로 만들어 버렸다. 바쁜 일상에서 등굣길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 줄 시간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단발머리를 만들어 버린 어머니의 미적 기준을 그 당시엔 몹시 원망했지만 그만큼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가 지금은 몹시 가엾고 사랑스럽다. 어쨌든 보자기를 어머니가 펄럭이며 들고 나오는 날은 은근히 긴장하며 쭈뼛거렸던 기억이 있다.
보자기에 대한 마지막 특별한 기억은 중학교 1학년 무용 발표회 시간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현대무용을 전공하셨던 선생님이었던 것 같은데 무용시간에 학생들을 조별로 나눠 무용 발표를 하도록 했다. 그때 난 왕자 역을 맡아 푸른 체육복 위에 보자기를 망토처럼 두른 채 친구의 실내화를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라고 생각하며 춤을 추었다. 당시 선생님은 많은 칭찬과 함께 10점 만점을 주어 나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셨다. 가슴 뭉클한 점수였다. 그때 받은 10점 만점이 어쩌면 내 인생에 불타는 창작욕을 일으키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후 내 주위에서는 점차 보자기가 사라지고 대신 비닐봉지가 늘어났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에겐 여전히 서너 장의 보자기가 있었다. 때로는 힘든 아버지의 일상에 맛있는 도시락을, 때로는 인심 후한 외가의 호박과 찹쌀을, 때로는 자라는 아이들의 무한대의 꿈을 날라 오던 요술 보자기였다.
비닐봉지가 넘쳐나는 요즘, 문득 집 안 서랍장을 열고 몇 개의 보자기를 가지고 있나 살펴보다가 한 장도 없음을 알고 놀랐다. 푸짐한 인심을 날라 오던, 무한의 꿈을 꾸게 했던 그 보자기가 이제는 단 한 장도 없다.
아, 글이 안 될 때, 가끔 보자기를 두르고 슈퍼맨이 되어 날아가고 싶어지는 건 그때가 그리워서일까?
극작가 오은희
○오은희씨는?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8년 부산대 중문학과 졸업 후 1991년 ‘아바돈을 위한 조곡’이 경향신문 신춘문예 희곡부문에 당선돼 데뷔했다. 뮤지컬 ‘동숭동 연가’(1993년)를 시작으로 대표작인 창작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등 20편이 넘는 뮤지컬과 연극 대본을 써왔다. 1995년 ‘번데기’로 제1회 한국뮤지컬 대상 극본상을 수상했다. 현재 창작뮤지컬 ‘달고나’ 공연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