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다. 캠퍼스는 갓 들어온 신입생들로 가득하다. 모진 한국 입시의 문을 뚫고 들어온 신입생들의 얼굴은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한 듯 봄꽃 같다. 이들은 새마을운동 세대(자본주의 1세대)의 자본을 토대로 정치적 자의식을 키운 386세대(자본주의 2세대)와 다르다. 1990년대 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면서 저항 문화의 잠재력을 키우던 신세대 문화와도 구별된다. 새내기를 기다리는 것은 수순처럼 된 해외 어학연수와 청년실업이라는 불투명한 미래다.
그래서인지 대학생의 최대 관심사는 ‘재화 획득’과 관계가 있다. ‘1억 만들기’ ‘3억 만들기’ 책이 서점가에서 불티나듯 팔려 나간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관심사 1순위는 ‘돈’, 2순위는 ‘사랑’, 3순위는 ‘건강’이란다. 최근 모 대학에서 수강 인원 수백 명이 넘은 강의명은 ‘부자학개론’이었다. 몇 년 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누가 내 치즈를 옮겼나’와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돼 ‘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했다. 광고 카피의 새해인사에서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고 외친 것은 자본의 증식력에 대한 일종의 강력한 전조였던 것일까.
▼대학가 휩쓰는 부자학 강의▼
1930년대 이상은 소설 ‘날개’에서 매음으로 돈을 번 아내가 자신에게 준 용돈을 구더기가 득실대는 재래 화장실 밑으로 버리며 침을 뱉기도 했다. 한국 근대화의 과정이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적 방식으로 전개돼 왔던 것을 상기해 보자. “인천항에 배만 들어오면”이라는 농담 섞인 말은 서구에 철저하게 물질적 기대를 걸던 과거 근대사를 반영한다. 한국 부자들은 뇌물 부동산투기 등과 연관되어 천민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냈다. ‘자본’ ‘돈’ ‘부자’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부자학’ 강의가 최고의 인기 강좌라는 것은 청년문화에서 분명 새로운 징후다. 부자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 인식을 불식하는 새로운 해석이다. 이들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떳떳하게 밝힌다. 로또와 벤처 창업과 성공 신화가 날마다 재화에 대한 꿈을 키워 낸다. 도시 공간에는 ‘부자접근지대’가 따로 구별될 정도다. 드라마는 재벌이 등장해야만 시청자들의 욕망을 대리 만족시킨다. 드라마 ‘쾌걸 춘향’에서 인기가 있던 배우는 중산층인 이몽룡이 아니라 재벌인 변학도였다. ‘파리의 연인’에서 가난한 유학생은 재벌 2세를 만나야만 한다. 스크린은 부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 주고 부자의 삶을 훔쳐보게 한다. ‘20대에 5억 만들기’는 스크린에 투사한 부자 욕망의 실체다.
그러나 기업들은 자국 내에 재투자하지 않고 공장을 중국이나 동남아로 옮긴다. 대학생들은 취직할 곳이 없고 ‘부자’에 대한 강박만 더욱 심해져 학생식당 점심(1500원)을 굶으며 ‘1억 만들기’를 시도한다. 가진 모든 돈을 주식에 투자하다 실패한 딸은 목숨을 끊었다. 엘리트 대학생들은 한국경제 발전의 생산적 전망보다 안정된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법대와 의대를 선택함으로써 경제적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아닌 기존의 부를 ‘나누어 가지는’ 소시민적 안위를 보장받는다.
▼청년문화 바탕은 비판의식▼
2000년대 세대가 청소년기에 외환위기를 겪었고 가정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직접 체험한 세대라는 성장기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년문화가 힘의 질서를 ‘돈’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 자본 축적을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긴다는 사실은 왠지 씁쓸하다. 지금의 세대가 4·19세대나 386세대의 시대적 유산을 계승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신세대 문화가 새로운 저항적 문화 실천을 예감하게 했다면 지금의 청년문화는 극단적 자본 생존의 논리에 복속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청년문화는 계급성이나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나 심미적, 취향적 가치를 둘러싼 담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한국은 20세기 초엽처럼 여전히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다. 일촉즉발의 시대다. 청년문화의 ‘부자학’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당대적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현실성과 역사인식을 지녀야 한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