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시에 사는 소피 길보 씨는 이 나라에서 성공한 여성의 전형으로 꼽힌다.
우선 금융회사의 매니저로 일하기 때문에 수입이 넉넉하다. 그뿐 아니다. 두 살 난 아들에게도 아직까지는 ‘좋은 엄마’다. 주중엔 친정 부모님이 맡아서 키워 주긴 하지만 주말과 휴일은 온전히 아들과 함께 보낸다. 여기에다 2주에 한 번은 반나절 휴가를 내 아들과 시간을 보낸다.
개인적으로도 부족할 게 없다. 주중에 쇼핑을 즐길 수도 있고, 영화나 전시회를 관람할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휴가는 연간 6주에 이른다. 한국의 직장 여성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삶의 질’을 누리고 있는 것.
이런 생활이 가능한 것은 다름 아닌 ‘주 35시간 근로제’ 덕분이다. 그러나 길보 씨의 ‘즐거운 인생’도 이제 갈림길에 섰다고 AP통신이 23일 전했다. 주 35시간 근로제가 마침내 무너졌기 때문.
주요 국가들의
주당 노동시간독일40이탈리아40대만42싱가포르44일본40미국40한국40노동부, 2003년 기준
프랑스 하원은 22일 찬성 350표, 반대 135표로 주 35시간 근로제를 완화하는 새 법안을 통과시켰다. 새 법안은 노사 합의를 통해 주당 13시간, 연간으로는 220시간의 초과 근무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난주엔 100만 명이 넘는 근로자들이 시위를 벌이며 새 법안에 반대했다. 근로자들의 이 같은 불만은 5월로 예정된 유럽헌법 투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자크 시라크 정부가 새 법안을 밀어붙인 이유는 경제를 되살리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주 35시간 근로제는 ‘실업률 해소’라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됐다. 1998년 사회당 정부는 ‘노동시간을 10% 줄이면 추가 비용 없이 약 7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마르틴 오브리 당시 노동부 장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았고, 노동시간 감축으로 기업의 인건비만 증가시키는 부작용만 키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03년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1431시간. 독일은 1446시간, 영국은 1673시간, 미국은 1792시간, 한국은 무려 2390시간이었다. 프랑스보다 적게 일하는 나라는 25개국 가운데 노르웨이와 네덜란드밖에 없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해외 투자자들이 프랑스에 대한 투자를 줄이거나 기존의 공장을 해외로 이전했고 프랑스 경제는 계속 침체를 겪어 왔다.
또 경영진이 비용 상승을 막기 위해 임금을 동결하는 바람에 봉급이 적은 생산직 근로자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들은 근무시간을 늘려 수입도 늘리려 했지만 주 35시간 근무제에 막혀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막상 근무시간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선 근로자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최근 실시된 한 설문 조사에서는 봉급생활자의 56%가 정부의 근로시간 연장에 반대했다. ‘돈’보다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새 법안을 적용하려면 회사가 노동조합과 협상을 벌여야 한다. 따라서 새 법안이 정착할 때까지 프랑스 사회는 적지 않은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파리=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