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와 과거사 문제로 한일관계에 격랑이 일고 있다. 외교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교류도 중단되거나 위축되고 있다.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동아일보와 일본 아사히신문의 논설위원이 상대국 국민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필자인 김충식 논설위원과 고스게 고이치 논설위원은 각각 도쿄와 서울에서 특파원(지사장, 지국장)을 지냈고 현재는 양국 관계 등 외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일본 국민에게 - ‘피해자의 아픔’ 알아야▼
서울 주재 특파원을 지낸 일본 중의원(衆議院)의 H 의원은 나에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과거사에 대해 과잉 반응한다. 보통의 일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들이대며 화를 내곤 한다.”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 일본인이 보기에는 한국의 식었다가 달아오르는 불가측의 온도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여기에 인식의 갭이 있다. 우선, 일본인에겐 한반도 식민 지배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인은 20세기를 일제 지배와 그 여진(餘震)의 시대라고 기억하고 있고, 실제로 오늘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믿는다. 또 가해자 측은 지나치게 망각하고, 당한 측은 지나치게 잊지 못하는 점도 있으리라.
조선시대에 의병(義兵)이 있었다. 자발적 민병대 같은 것으로, 늘 일본의 선제공격에 대항해 조직되었다. 독도 문제에 관한 한국인들의 반응은 가히 ‘의병’을 닮았다. 한국의 남녀노소가 하나가 되어 거국적으로 분노하는 것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일본 일부에서는 ‘한국 정부가 독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식으로 비판하지만, 그래서 그것은 틀린 것이다.
의병의 특징은 공격을 당한 뒤의 방어용이라는 점이다. 독도 문제도 시마네 현의 조례라는 선제공격에 의한 것이요, 한국에서는 구국운동처럼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독도는 섬이고 역사가 아닌데 왜 한꺼번에 다루느냐는 일본의 비판도 있다. 일본에서는 독도가 어업문제이거나 ‘계륵(鷄肋)’ 같은 영토 문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도는 일제 침탈의 상처이며, 가슴 아픈 망국의 시발역이기도 하다. 한국에선 수난의 역사의 상징인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해 가던 1905년 느닷없이 자국 영토로 고시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합방해 가던 길목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한국은 독도를 포함한 모든 영토를 갖고 독립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문제 제기는 제국시대의 발상으로 여겨지고 역사인식의 문제로 간주된다.
국제법상의 ‘무주지(無主地) 선점’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도 반감을 갖는 게 한국이다. 동양의 수천 년 역사에서 영토를 고시해서 명기한 게 언제부터인가? 힘 있는 나라가 절차와 형식을 내세워 타국을 침략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 아닌가?
한편 일본에선 왜 사죄를 되풀이해서 요구하느냐는 말도 나온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죄의 의미를 짓밟고 뒤집어 버리는 일본 측 망언의 횟수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망언의 어휘는 일본 국내 정치용이므로 거칠다. 사죄의 단어는 국내외를 살피며, 치밀하게 걸러지기 때문에 신중하다. 그래서 사죄는 망언에 가려지고 의미를 잃어 왔다.
1945년 이후 일본의 자랑스러운 성취는 세계가 다 인정한다. 잿더미를 딛고 세계의 경제대국이 되고 아시아 아프리카에 정부개발원조(ODA)를 많이 하는 지도적 국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그 경쟁력 있는 ‘모노즈쿠리(물건 만들기)’를 부러워하며, 거기에 상응하는 열리고 합리적인 ‘고고로즈쿠리(마음가짐)’를 기대한다. 한국인은 ‘열린 마음의 선진 일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한국 국민에게 - 공통이익 찾는 지혜를▼
“저기 서울시 석조 청사는 서울을 ‘경성’이라고 부르던 때의 경성부청입니다.” “저쪽에 보이는 건물은 당시 미쓰코시(三越)백화점이고요.”
서울 근무 때 일본에서 온 손님에게 이런 말을 하며 안내해 준 일이 몇 번 있다.
그런데 친한 한국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면 일본인들이 당시를 그리워하며 자긍심마저 느끼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해 겸연쩍어한 적이 있다. 이웃 나라끼리, 그것도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가 있으니 일이 간단하지 않다.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를 둘러싼 문제도 이와 비슷해 다루는 방식의 차가 크다.
한국 측은 시마네(島根) 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을 보며 어떤 노림수가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한다. 물론 일본에는 아사히신문도 걱정하고 비판할 만큼 야스쿠니(靖國)신사, 망언 등 문제가 많으니 그렇게 볼만도 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런 흐름과 다르다고 본다.
다케시마에 대한 일본 전체의 관심은 낮다. 하지만 섬 주변은 한일공동관리수역인데도 일본 측이 만족스럽게 조업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북방 영토만큼 열의를 보이지 않고, 조업환경 개선을 위해 한국 측과 부닥치는 모습도 없다. 이런 데 대한 불만이 거세져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 편입 100주년을 맞아 중앙 정부에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100년 전은 일본이 한반도를 한창 식민지화할 무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 조례가 그런 역사를 정당화하려 한 의도는 조금도 없다.
한국 측은 중대한 주권 침해라고 다루며 다시 묻는다. ‘한일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을 알면서도 왜 일본 정부는 막지 않았느냐’라고.
사실은 정부가 현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방자치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고, ‘제왕적 대통령제’로 칭해지는 한국에서는 중앙의 지시와 의향은 지방에 쉽게 도달되지만 일본은 다르다.
‘보스 정치의 종언’이란 면도 무시할 수 없다. 파벌의 힘은 약해지고, 국회의원이 지방에 힘을 미치던 시대도 끝나가고 있다. 아무리 현직 관방장관과 자민당 참의원 의장이 시마네 현 출신이라 해도 영향력 행사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은 또 다음 달 초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를 앞두고 다케시마 조례와 역사교과서를 같은 맥락에서 다룬다. 4년 전 가장 큰 논란이 된 후소샤(扶桑社)의 역사교과서 신판을 놓고 “또 역사 왜곡”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역사와 영토의 상승효과에 의한 일본 비판이 높아가고 있다.
교과서 검정과 조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게 혼동되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시마네 현에서 4년 전 후소샤의 역사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한 군데도 없었다.
다케시마 주변을 둘러싼 근세 때부터 명칭의 혼란, 다양한 문서의 해석과 신빙성의 문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한 섬에 다케시마가 들어 있지 않았던 점 등 일본 측에도 주장의 근거가 있어 결론은 내려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다케시마 문제가 한국인에게 식민지 피지배 역사와 민족의 자존심 문제가 겹쳐지는 측면은 이해된다. 일본 측도 피해자의 아픔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한일 간 경제, 문화, 인적 교류 증가로 한국은 보통의 일본 사람을 매료시키는 나라가 되었다. 이번 일을, 양국 공통의 이익으로 만들 지혜를 짜내는 계기로 삼고 싶다.
고스게 고이치 아사히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