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바흐가 태어나고 활동한 아이제나흐 시. 마르틴 루터가 은거하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바르트부르크 성에 올라서면 아이제나흐를 둘러싸고 있는 튀링엔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정태남 씨
종교개혁의 기수 마르틴 루터가 은거하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던 바르트부르크 성. 이곳에 올라서면 울창한 튀링엔 숲으로 둘러싸인 아이제나흐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이 도시는 루터가 초등교육을 받은 곳이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태어나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곳이다.
독일은 음악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두 개의 큰 문화권, 즉 이탈리아와 가까운 남부 가톨릭 영향권과 중부 및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영향권으로 나누어 볼 수 있겠는데, 프로테스탄트 음악은 루터에 의하여 1525년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바흐가 활동하던 1700년대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프로테스탄트권의 핵심을 이루는 곳은 북해로 흘러 들어가는 엘베 강의 중간 지역으로, 튀링엔 지방과 작센 지방이 이곳에 속한다. 이 지역은 독일이 통일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두 동독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금단의 땅이었다.
○ 루터교 신자이던 바흐가문 음악가 100여명 배출
바흐는 지금부터 꼭 320년 전, 1685년 3월 21일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한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음악가의 일족에 둘러싸여 어려서부터 재능을 나타내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의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은 아이제나흐의 구심점인 게오르크교회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에 위치한 바흐하우스. 이 집은 바흐가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주택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전후 동독 정부가 말끔히 복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바흐가 죽은 175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루어진 바흐에 관한 연구 자료들과 바흐 시대의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악기 전시실에서는 바흐의 음악에 대한 강연이 끝나면 당시의 악기로 바흐의 음악을 직접 들려주기도 한다. 뒤뜰 안쪽에는 바흐 가문 출신의 음악가들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바흐의 가문은 모두 경건한 루터교 신자들로, 튀링엔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200년 이상 7대에 걸쳐 작곡가, 오르간 주자, 교회의 악장 등 100명 이상의 훌륭한 음악가를 배출했다. 이는 유전학상으로도 매우 흥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바흐 가계에서 바흐 다음으로 음악사에서 가장 걸출했던 음악가들은 바로 그의 아들들이다. 바흐는 두 번의 결혼을 통하여 자그마치 스무 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았고, 그중 아홉 명만 살아남았다. 그중에서 세 아들, 즉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하여 18세기 후반의 서양 음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바흐하우스 앞에 서 있는 바흐 동상.
○ ‘음악의 아버지’진가 멘델스존에 의해 死後 재발견
바흐하우스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만 광장에는 바흐의 동상이 서있고, 그 건너편에는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다. 그런데 동상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누구의 장난인지는 모르지만, 손위에 술병을 거꾸로 올려놓았다. 바흐의 아성에 흠집을 내고 싶어서 그랬을까?
바흐는 원래 매우 경건한 루터교인으로 인식돼 왔지만 이를 완전히 뒤집는 학설도 있다. 실제로는 정욕이 넘치는 남자로 칼을 차고 다니면서 여자들을 희롱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가 꽃핀 19세기에는 예술가의 생애가 작품만큼이나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이전 시대 인물들이 나중에 제멋대로 미화된 경우가 많다. 바흐의 경우도 그런 것일까?
사실 바흐는 생존 당시 작곡가로서보다는 오르간 연주자나 오르간 음악 즉흥 연주자, 또는 음악 선생 등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죽은 후 그의 이름은 거의 잊혀져 버렸다. 위대한 작곡가로서의 진가는 멘델스존에 의하여 180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재발견되었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 근대적 개념이 싹트기 시작하는 1600년대를 음악의 소년기라고 본다면, 1700년대는 새로운 시대, 즉 정신적으로 원숙해 가는 성년의 초기에 해당한다. 이때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발전하여, 음악이 지니고 있던 여러 가지의 가능성이 최고의 수준으로 발휘되기에 이른다.
바흐는 바로 이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독일어로 바흐(Bach)란 개울물이란 뜻이지만, 음악가 바흐는 모든 음악을 포용하는 깊은 강이었다. 바흐의 생애에 관한 일부의 시비는 제쳐놓더라도 말이다.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달빛아래서 악보 베끼다…바흐, 눈병으로 수술까지▼
바흐는 늙어서 눈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여 수술까지 받을 정도였는데, 눈병의 원인은 어릴 때 촛불도 없이 악보를 베끼느라고 눈을 혹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린 바흐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아버지의 사촌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가 연주하는 오르간을 들으면서 자랐으며, 교회에서는 소년 성가대 단원이었다. 어린 나이에 양친이 죽자, 그는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라게 된다. 맏형은 바로크 음악의 대가 파헬벨의 제자로 당대 유명한 대음악가들의 작품 악보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어린 바흐는 달이 밝은 밤이면 형 몰래 악보를 꺼내 베꼈다고 전해진다. 형이 애지중지하며 소장한 곡들은 6개월 후에는 모두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바흐도 마침내 파헬벨의 음악을 습득하게 되고, 그 영향은 훗날 그의 작품에도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