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신양희(申良姬·47·여) 씨 집 장롱 속에는 150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한 달째 잠자고 있다.
지난달 말 아파트 계약금을 내기 위해 적금을 헐었지만 집주인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거래가 무산된 탓이다.
신 씨는 돈을 다시 은행에 넣을까 생각했지만 4%대의 금리가 불만이다. 딸은 라식수술을 하게 해 달라고 조르고 남편은 새 차를 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신 씨는 “목돈을 쓰는 게 부담스럽다”며 “1500만 원을 어떻게 쓸지 한동안 결정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돈이 돌지 않고 있다.
가계 은행 기업 등 주요 경제 주체의 금융과 상거래가 뜸해지면서 돈이 흐르는 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24일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10∼12월) 통화 유통속도는 0.618. 이 속도는 1997년(0.737) 이후 계속 감소해 2002년 0.614까지 떨어졌다. 2003년 회복 기미를 보였지만 최근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가계 은행 기업 “돈 쓰기 어렵다”=돈이 가계 은행 기업 등 경제 주체를 거칠 때마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현금을 집에 보관하는 사람이 늘면서 은행권 예금 잔액은 올해 1월 714조 원으로 2004년 12월(722조 원)에 비해 1.1% 줄었다.
은행은 대출해 줄 만한 곳이 없어 고민이다. 주택을 담보로 대출 받으려는 개인이 눈에 띄게 감소한 데다 상환 능력이 있는 우량 기업은 돈을 빌리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은행권의 대출 잔액은 지난해 12월 571조 원에서 올해 1월 568조 원으로 3조 원 줄었다.
국민은행 리테일상품팀 손홍익(孫洪翼) 차장은 “대출시장이 포화상태여서 신규 대출 수요를 찾기 어렵다”고 전했다.
기업은 경기 전망이 어렵다며 돈 쓰기를 주저한다.
정보통신 기업인 S사의 현금 보유액은 2000억 원. S사는 지난해 이 돈을 고스란히 금고에 넣어두었다. 부동산과 주식에 약간 투자했을 뿐이다. 업체 관계자는 “신규 투자를 못한 데다 기존 사업도 부진해 매출액이 1년 새 30% 이상 감소했다”고 말했다.
▽투자 걸림돌 치워야=가계 은행 기업 등 각 경제 주체가 투자를 유보하는 것은 △저금리로 인한 현금 보유 성향 상승 △대출 수요 감소 △신규 투자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투자의 걸림돌을 제거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은행은 가계와 대기업으로 집중된 대출 관행을 개선해 중소기업 대출을 늘려야 한다. 중소기업 신용평가시스템을 개선해 프로젝트에 따라 대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명지대 조동근(趙東根·경제학) 교수는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출자총액제한 제도 등 각종 규제를 풀어 기업이 돈을 쓰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처방을 제시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통화 유통속도▼
통화 한 단위가 일정 기간 각종 거래를 위해 몇 번 유통됐는지를 나타내는 지표. 이 속도는 경기가 좋을 때는 빨라지고 나쁠 때는 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