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은 두 개의 기념일이 겹친 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면서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유엔과 유네스코, 유럽물리학회는 올해를 ‘물리학의 해’로 정했다.
1905년, 스위스 베른의 특허국에 근무하던 아인슈타인은 무명의 26세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해 발표한 일련의 논문을 통해 현대 물리학의 기초를 다짐으로써 20세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해 아인슈타인은 모두 4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3월에 발표한 첫 논문에서 그는 빛이 에너지 입자로 구성됐다는 가설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두 번째 논문에서는 원자와 분자의 존재에 대한 브라운운동을 설명했다. 세 번째 논문이 유명한 특수상대성 이론이다. 9월에 발표한 마지막 네 번째 논문에서 그는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E=mC²) 이론을 확립했다.
가장 혁명적이었던 것은 1921년 그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준 첫 번째 논문이다. 상대성 이론도 혁명적이긴 했지만 다른 과학자가 조금 앞서 비슷한 이론을 내놨기 때문에 노벨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모든 이론을 스스로 만들었다. 공개된 이론을 토대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상대성 이론을 발표할 때도 그는 어떤 과학자의 이론도 인용하지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독창적인 과학자로 존경받았다. 찰리 채플린은 그를 이렇게 치켜세웠다.
“나로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내게 환호한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갈채를 받는다.”
그가 천재 물리학자를 넘어 위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이로서 그는 평화를 향해 질주하는 투사였다. 쇼비니즘(국수주의)을 증오한 세계주의자였다. 1910년대부터 그는 ‘하나의 유럽’을 부르짖었다. 국가들 사이에 문화적 과학적 유대 관계가 깊어지면 평화가 정착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1939년, 독일의 핵무기 개발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역량에 맞게 행동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 대통령직을 제안받았을 때 그는 이런 말로 거절했다.
“나는 우주의 법칙은 잘 알지만 인간에 대해선 모른다. 더욱이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일도 해야 하는 위치다. 나는 그렇게는 할 수 없다.”
행동하는 지식인이면서, 동시에 세상에 책임을 지는 지식인이었다는 점도 돋보인다. 그는 미국의 핵무기 개발을 촉구하긴 했지만 악(惡)에 맞서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핵무기 자체에는 반대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세계 여론을 환기시켰다.
한 가지 사족을 덧붙이자면, 26세 된 무명의 젊은 학자 논문을 같은 해에 4개씩이나 실어 줄 학술지가 지금 과연 있는가. 새로운 천재가 햇빛을 보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다.
제라르 뱅데 에뒤프랑스 회장
▼약력▼
△오트 알자스 대학 총장 △국립대학평의회 의장 △현 에뒤프랑스(프랑스 고등교육을 해외에 소개하는 기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