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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밀물과 썰물

입력 | 2005-03-24 18:52:00

그림 박순철


“내가 들으니 병법에서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공격하라 하였소. 지금 한신이 수만 군사를 일컬으며 오고 있지만 실제로 싸울만한 군사는 몇 천 명에 지나지 않소. 게다가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이미 장졸 모두 몹시 지쳐있을 것이오. 그런데 이렇게 허약하고 지친 적을 피하기만 하고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나중에 정작 적의 대군이 몰려왔을 때는 어떻게 하겠소? 거기다가 천하의 제후들도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보고 있소. 이번에 우리가 제대로 싸워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는 다른 제후들도 우리를 얕보아 함부로 쳐들어오게 될 것이오!”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가 그렇게 한신이 거느린 군사를 얕보게 된 데는 까닭이 있었다. 한신은 조참에게 3만 군사를 주어 형양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곳곳에 사람을 풀어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지금 패왕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형양에 있는 한왕 유방이 위급하다더라. 한신이 남아있는 것은 조나라까지 패왕을 편들려 올까봐 정형구(井형口)로 쳐들어가는 흉내만 내는 것이라더라. 정병은 모두 조참에게 딸려 형양으로 보내고 자신은 겨우 몇 천 명만 남겨 성안군 진여의 이목을 끌기 위함일 뿐, 정말로 조나라를 치기위한 것이 아니라더라.”

그리고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보이도록 꾸몄다. 곧 떠나는 조참의 군사는 깃발을 늘이고 대(隊)와 오(伍) 사이를 벌려 원래보다 훨씬 많게 보이도록 하고, 자신이 거느린 군사들을 되도록 감추고 흩어 얼마 되지 않게 보이도록 했다. 그러자 먼저 대나라 백성들이 속고, 나중에는 그 말이 멀리 조나라까지 전해져 진여도 그렇게 믿게 되었다.

하지만 한신은 그렇게 헛소문을 퍼뜨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병법에 밝고 매사에 헤아림 깊은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진여 곁에 붙어있음을 한신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형 길로 군사를 몰아넣기 전에 가만히 간세(奸細)를 풀어 진여의 움직임을 살펴보게 했다.

“성안군 진여가 군사 20만을 일으켰으나, 이좌거의 말을 듣지 않고 정형 읍성(邑城) 밖에 대군을 머무르게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부근 벌판에 진채를 세우고 기다리다가 정형구(井형口)를 나오는 우리 한군을 정면으로 받아칠 작정인 듯합니다.”

오래잖아 조나라로 간 간세들에게서 그런 전갈이 왔다. 그 말을 들은 한신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곧 장이와 여러 장수들을 대장군의 군막으로 불러들여 말했다.

“진여가 드디어 우리에게 그 목을 바칠 작정인가 보오. 정형 길을 비워 두었다니 진여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하루 빨리 그곳을 지나도록 합시다.”

그리고는 장졸들을 재촉하여 정형 길로 접어들었다. 우물처럼 사방에 솟은 산등허리 사이로 난 좁고 험한 길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틀을 달려 그 길을 지난 한신은 조나라 쪽 어귀에서 30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야 군사들을 멈추었다.

“이제 좁은 길목과 적이 매복하기 좋은 곳은 모두 지나왔다. 남은 길은 설령 적이 막고 기다린다 해도 전혀 겁날 게 없다. 모두 배부르게 먹고 푹 쉬도록 하라. 내일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싸움이 있을 것이다!”

한신은 아직 해가 남아있는 데도 그렇게 말하며 장졸들을 거기서 편히 쉬게 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