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한 지 여섯 달이 지났네요. 2004년 9월 20일부터 2005년 3월 26일까지, 제게는 특별한 사건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단편소설 두 개를 완성했고, 소설을 마감한 날이면 어김없이 미장원에 들러 머리칼을 잘랐습니다.
몇 번의 가벼운 감기몸살을 앓았고, 오랫동안 말썽을 부리던 컴퓨터 프린터를 교체했으며, 멀리 바다를 보러 다녀왔지요. 그것뿐입니다. 저의 일상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어요. 바깥 세계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귀에 들려 왔지만 시간은 다만 무심히 흘러 계절을 세 번 바꾸었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정말 모든 게 그대로라고 느껴지는 그런 나날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느낌이 있는 편지’와 함께했던 지난 몇 계절을 떠올렸습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어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한 시간들. 그러나 그 사소한 일상들이, 미미하여 더 소중한 변화의 순간들을 품고 있었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됩니다. 오늘, 때늦은 찬바람에 창밖의 나뭇가지들이 제각각의 방식으로 수런거리며 몸을 뒤척이는 광경을 보면서 그 소소한 움직임들 속에 스며 있는 시간의 틈새에 대해 새삼 감탄했습니다.
처음 선생님과 편지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 저는 이 공개적인 서신 안에 ‘나’를 얼마나 드러내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어요. 일본의 석학 나카무라 유지로와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서간집 ‘인간을 넘어서’를 들추어 보며 그 솔직함에 감탄하기도 했고 또 어떤 구절에서는 솔직함으로 위장한 글쓴이의 속내가 감지되어 쓴웃음이 나기도 했습니다. 나는 대체 어떤 편지를 써야 ‘들키지’ 않는단 말인가, 한참을 망설였더랬지요. 선생님, 편지란 무엇인가요?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신’을 읽어내는 작업은 아닐까요. 자신을 너무 많이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내가 상대의 행간을 잘 읽어내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은 편지를 쓰는 모든 사람이 감당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강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정직하면서 타인의 내면을 겸손하게 해독하는 일. 쉬울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 불안감과 다소간의 무모함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소통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편지란 결국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내부를, 그 내부의 희미한 움직임을 읽어내는 일일 테니까요. 문학의 소임 또한 그런 것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스스로의 내면에 고요히 번져가던 그 ‘작은’ 변화들에 대해 의식하지 못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주신 마지막 편지를 읽으며 비로소 지난 몇 계절이 그냥 왔다 가버리지 않았음을 즐겁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안경환 선생님, 부디 건강하세요. 지금까지 ‘느낌’을 함께 나누었던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정이현 소설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