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3년 동안 무수한 인명 피해를 낸 전쟁이 끝났다. 200만 명이 넘는 피란민으로 생존의 아수라장이 되었던 부산도 ‘임시수도 1000일’의 막을 내렸다. 유행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 회자되는 가운데 판잣집 피란살이 설움을 걷고 기차 지붕에까지 빽빽이 올라앉은 피란민들의 환도가 이어졌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엄청난 비극을 체험했고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에도 아랑곳 않고, 휴전선 턱밑에 있는 서울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내야 할 대한민국의 수도였다.
전쟁 3년 동안 폭격으로 유령 도시가 되었던 서울은 그 후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으나 인구 폭발에 따른 교통난, 도시공해 등 많은 문제가 야기되자 오늘의 참여정부가 ‘충청권 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워 정권 창출에 성공했다. 부도덕한 구세대에 신물 난 국민이 참여정부의 개혁성을 높이 샀으나 수도 이전의 공약을 강행한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수도 이전이 좌절되자 그 대안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전국이 균형 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한강의 기적 이룬 도읍지▼
그러나 ‘분산·분권을 통한 국토의 균형 발전’을 달성하는 데 행정수도 건설이 얼마만큼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국토 균형 발전이 곧 ‘농촌의 도시화’는 아닐 것이다. 지역 특성화란 이름 아래 곳곳에 도시를 건설한다면 이는 전 국토의 도시화 지향이고 국토 훼손이다. 농촌은 농경사회 본래 모습대로 보존됨이 마땅하다. 강원도를 예로 든다면 개발을 막아 이 나라의 ‘허파’로서 자연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쪽이 대한민국의 균형에는 더욱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
미국의 도시는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 중동부에 집중되어 있고 우리나라보다 큰 면적의 몬태나 주, 와이오밍 주, 네바다 주 등은 불모지에 가깝다. 호주는 인구의 대부분이 동남 해안지방 도시에 모여 산다. 좁은 국토에 수도가 중심부에 있어야 할 당위성도 없다. 워싱턴 런던 파리도 국토 중심권에 있지 않지만 그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직 통일을 달성하지 못한 마당에 행정부처 일부를 이전한다는 게 과연 타당할까. 때늦은 감이 있지만 서울과 수도권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낼 다른 대안은 정말 없을까.
‘삶의 공간’의 재편성, 즉 ‘삶의 질’을 평균화한다는 목적 역시 그렇다. 서울 시민의 삶이 다른 지방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삶의 질을 재화의 유통만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서울 시민은 치솟는 집값과 전세금에 고통 받고 새벽부터 출근전쟁을 치른다. 숨 막히는 공해에 신음하며 언제 퇴출당할지 모르는 경쟁사회의 스트레스를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이 받는 것도 서울 시민이다. 오후 10시까지 불 밝힌 대형 빌딩 안의 샐러리맨들을 보라. 영세민 극빈층 실직자 노숙자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이 서울을 못 떠나는 이유는 그나마 서울에서 버텨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골은 상대적으로 공해 없는 자연, 상부상조의 협동성, 정년과 상관없는 일터가 있기에 삶이 한결 여유롭다.
▼세계적 추세 외면한 분산論▼
행정부처 일부와 180개 공공기관이 이전한다 해도 이 나라의 수도는 여전히 서울이다. 서울은 600여 년의 영욕을 겪어 온 우리 민족의 수도요, 이 나라 정체성의 상징이다. 대도시가 부가 편재돼 있는 향락산업 및 범죄의 온상이라고 지탄받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경우가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도시가 삶의 희로애락을 수용하며 유동체로서 지금도 성장해 가는 것은 전 지구적 추세이다.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한의 수도는 평양이고 남한의 수도는 서울임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독도가 우리 영토이듯 북한 표준말은 평양말, 남한 표준말은 서울말이다. 언젠가 남북이 통일되는 그날에는 서울말이 표준말이 되어야 하고 이 나라 수도는 서울이 되어야 한다.
김원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