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도, 위태롭게도 느낀다. 긍지와 불안의 정도가 아내조차 나와 같지 않으니 국민 사이에선 천차만별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힘을, 그리고 가능성과 한계를 등신대(等身大)로 알고 싶다. 67kg 몸 안의 병조차 모르면서 나라 상태를 꿰뚫어본다는 게 쉬울 턱이 없다. 몇 가지 단면을 보고 비관이나 낙관 어느 쪽에 기우는 것도 무익(無益)을 넘어 유해할 수 있어 경계할 일이다. 그럴수록 국가 지도층부터 개개 국민까지 ‘내 나라 바로알기’ 노력을 더 진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축구대표팀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지난 토요일 새벽 사우디아라비아 팀에 0-2로 지는 걸 보고 형편없다고 느낀 사람도 있을 터이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추억하며 또 해 낼 것이라고 믿는 측도 있을 법하다. 그래서 더 과학적으로 판단할 근거를 찾게 된다. 국제축구연맹(FIFA)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그끄제 경기 결과가 반영되지 않은 3월 랭킹이 세계 22위로 나와 있다. 기량이 시원찮다거나, 그래도 일낼 것이라는 감(感)보다는 이 숫자가 한국 축구의 등신대에 근접한다고 본다.
축구 4강 한번 되는 데도 엄청난 국가적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다. 반쪽이지만 월드컵 개최국이 되기 위한 스포츠외교 적공(積功)과 경기장 ‘출혈’ 건설, 탁월한 지도자 영입과 선수들을 개조(改造)하다시피 한 훈련, 4700만의 혼(魂)을 다 쏟은 것 같았던 응원…. 그리고 거기엔 보수도 진보도, 우파도 좌파도 없었다.
▼승부수 안 통한 외교와 경제▼
그럼에도 월드컵 4강은 역시 이변(異變)이었다. 지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스포츠도 그렇지만 경제나 외교는 더더욱 근거 없이 요행과 이변을 꿈꿔서는 안 된다. 자꾸 그러면 비웃음 사기 십상이다. 6명이 생명과 재산을 걸고 내기를 하는데 상대와 자신의 실력을 치밀하게 따져 보지도 않고 ‘배짱으로 다 걸면 내가 이긴다’고 믿는 것은 딱하다. 역량을 비교할 능력조차 없다면 원초적 불행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운(運)이 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곡절 많은 대통령 당선, 탄핵 위기에서의 부활 등 숱한 난관 돌파가 그런 믿음을 갖게 할 만도 하다. 그러나 국내 정치와 권력게임에서 적중했던 승부수가 경제와 외교에도 통한 것은 아니다.
해마다 7% 경제성장에 재임 중 일자리 250만 개 창출을 약속했지만 성장률은 임기 1년차 3.1%, 2년차 4.6%였다. 2월 현재 국내 취업자는 1년 전보다 8만 명 증가에 그치고, 고용률은 계속 떨어진다. 노무현 시대는 국민의 70%가 중산층이 되는 시대라고 했지만 중산층은 흔들리고 극빈층이 늘고 있다.
지난해 중국은 9.5%, 싱가포르는 8.5%, 홍콩은 8.3%, 말레이시아는 7.1%, 인도는 6.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들 나라 지도자는 “할 말은 한다”고 강조하는 대신 성적표를 펴 보인다. 고등학생은 중학생보다 키가 덜 큰다고 할지 몰라도 경제의 대학원생쯤 되는 미국이 4.4%, 일본이 2.7% 성장한 점도 새겨봐야 한다.
한국은 동북아의 균형자이며 한미동맹에도 문제가 없다고 대통령은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충격요법 자주 쓰면 폐품 만든다▼
김대중 정부 말기와 현 정부 초기에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폈을 때만 해도 중국과 일본이 경계심을 보였다. 요즘은 중심국가건, 경제중심이건, 균형자건, 무슨 말을 해도 이들은 귓등으로 듣는다. 미국에서는 한국과의 ‘우호적 결별’까지 공개적으로 거론된다. 결별하는 마당이라면 우호는 수사(修辭)에 가깝다. 많은 국민은 이런 현실을 보고 가슴 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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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는 왠지 라디오 때리기에 너무 익숙한 것 같다. 나는 이 점을 불안하게 느끼는 쪽이다.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