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독도 담판’이 다가오고 있다. 양국이 원칙적인 합의를 보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두 리더를 찬찬히 계체량(計體量)해 보면 신기할 정도로 닮은 데가 많다.
우선, 둘 다 정치적 이단(異端)으로 성장했으며 ‘외로운 늑대’처럼 정상에 올랐다.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보면 톱에 오를 수 없는 괴짜들이다. 노 대통령이 국민경선을 통해 밑바닥의 노풍(盧風)을 타고 청와대까지 입성했다면, 고이즈미 총리 역시 자민당의 파벌 절충보다 지방 대의원들의 성원과 바람에 힘입어 권좌에 올랐다. 양쪽 다 정치불신과 포퓰리즘에 편승한 ‘바람의 아들’인 셈이다.
말주변도 닮았다. 한 사람은 ‘노빠부대’를 부르고 ‘노사모’를 낳았다. 고이즈미 총리도 짧고 신선한 코멘트에 능한 일언거사(一言居士)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TV에 딱 들어맞는 15초짜리 발언으로 정치를 끌고 간다 해서 ‘원 프레이즈 폴리틱스’라는 조어가 생겼다.
두 사람은 또 의표(意表)를 찌르는 정치에 능하다. 탄핵을 불러들인 노 대통령이나, 두 번에 걸친 전격적인 평양 방문 쇼로 정국을 틀어쥔 고이즈미 총리나 늘 상식의 허를 노린다.
저돌적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노 대통령은 ‘불타는 전의(戰意)’로 유명하고, 고이즈미 총리 또한 역대 총리 가운데 ‘전투적’ 기세에서 으뜸이다. 의회에서 야당 당수를 비아냥대는 것이 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총리답게, 이죽거리듯 비웃지 말라”고 충고까지 할 정도다.
판이하게 대조적인 면이 없는 건 아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가문과 학벌에서 ‘귀족’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의원과 장관을 다 지냈고, 그 자신 게이오대 경제학과 출신의 세습의원이다. 노 대통령은 상업고 출신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자수성가형이다.
대미(對美)관계에서도 극명하게 갈린다. 전자는 자주노선을 내걸고 “얼굴을 붉힐 수 있다”며 대립적인 데 반해, 후자는 철저히 ‘대미 추종’이다. 고이즈미 총리 스스로 “나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꼬리가 찢어지도록 흔드는 강아지”라고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 농담한 적이 있다. 그에게 다행스러운 점은 일본인이 대체로 대미 추종을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두 승부사의 독도 담판은 어떻게 결판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승부가 날 리 없다. 아니, 승부가 난다면 그 또한 큰일이다. 한국이 이기더라도 일본에서 후지산 폭발보다 큰 정치재앙이 터지고 말 것이니, 한국의 승전보는 휴지조각이 될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독도 분쟁은 고이즈미 총리의 포퓰리즘과 맞닿아 있다. 그의 우익 표와 유족회 표를 겨냥한 고집스러운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한국과 중국은 늘 반발해 왔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는 임기 중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터라, 참배문제로 국내 여론에 더 시달려 왔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의 3·1절 항의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국내용 발언”이라고 일축했다. 주한 일본대사는 “독도는 명백한 일본 땅”이라며 기름을 끼얹었다. 그래서 최악으로 터져 버린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려는 두 갈래다. 하나는 노 대통령 역시 포퓰리즘에 기반을 둔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외교전쟁’ 발언이 웅변하듯이 확전이 선언돼 버렸다. 이것이 악순환으로 갈 우려조차 있다. 둘째, 외교에서의 포퓰리즘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고, 손실로 이어진다. 이미 독도와 역사교과서 문제로 양국의 인적 물적 교류가 동결되거나 끊어지고 있다.
그래서 독도 담판을 한일 축구처럼 느긋하게 즐길 수가 없는 것이다.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