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시민들과 세계 음악팬들에게 ‘카라얀 서커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베를린 필하모니 홀 앞에 선 사이먼 래틀 경. 그는 실험적인 프로그램 구성과 색채감이 뚜렷한 작품 해석으로 세계 교향악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진 제공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사무국
‘신동에서 황제로.’ 타악 영재 출신으로 2002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앙상블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 경에게 붙여지는 수식어다. 11월 7, 8일 베를린 필을 이끌고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두 차례 내한 연주회(동아일보사 주최)를 가질 래틀 경을 최근 독일 베를린 필하모니 메인 홀의 음악감독 접견실로 찾아가 만났다.
브리튼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 리허설을 갓 마친 그는 심벌마크인 곱슬머리 아래로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세계 음악계를 이끌어가는 ‘황제’에게선 전혀 권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래틀 경, 만나서 기쁩니다. 베를린에서의 생활도 이제 4년째로 접어들었는데요. 모든 것이 만족스럽습니까?
“처음 공개합니다만, 드디어 1월에 베를린에 내 이름으로 집을 사서 이사했어요. 말하자면 정주(定住)한 거죠.”
사이먼 래틀 경이 한국 청중에게 보내는 인사말. ‘한국 청중의 특별한 감상능력과 솔직한 반응을 체험하게 되기를 고대합니다. 베를린에서 사이먼 래틀’이라고 적었다.
그는 ‘멋진 도시, 멋진 오케스트라, 세계 어디에도 이런 곳은 없다. 나는 행운아다’라며 마냥 싱글거렸다.
―음악인생에서도 100% 만족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리는데요.
“20대에 이 방에 처음 와서 당시 상임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만났던 기억이 납니다. ‘이 악단은 10%를 주문하면 나머지 90%를 채워 준다’고 말씀하셨죠. 사실이었습니다. 리허설을 보셨겠지만, 이 악단의 분위기는 매우 우호적이고 개방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소홀한 데 하나 없이 집중적으로 연습에 임하죠.”
―음악팬들 사이에 떠도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전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을 푸르트벵글러화(化)했다, 카라얀은 이 악단을 카라얀화했다. 그러고 나서 클라우디오아바도가 취임한 뒤 그가 한 일은 악단을 탈(脫)카라얀화했다’는 건데요….
“(웃음) 자기 고유의 사운드를 빚어내고 싶은 욕구는 어느 지휘자에게나 있는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지요. 다만, 베를린 필에는 방금 언급된 거장들이 남긴 관습과 음악적 관념들이 깊이 배어 있습니다. 연습을 진행하다 푸르트벵글러의 흔적을 느끼고 흠칫 놀라곤 합니다. 카라얀이 이 악단에 남겨놓은 뜨겁고 집중적인 연주, 아바도가 남겨놓은 투명한 음향…. 이 흔적들이 없어진다면 무시무시한 일 아니겠어요?”
―한국 연주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가 나란히 눈에 띄는군요. 이번 내한공연의 주제는 ‘영웅주의’인가요?
“하하, 우연입니다. 이번 공연에서 한국 청중은 고전주의시대 하이든의 교향곡부터 현대음악까지 여러 시대, 여러 나라의 작곡가들이 쓴 다양한 음악을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귀 기울여 들어 보시라고 당부드리는 작품은 영국 작곡가 토머스 아데(34)의 ‘피난처들(Asyla)’입니다. 젊은 청중은 테크노뮤직이나 클럽음악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거예요.”
래틀 경은 한국 음악가들과도 인연이 깊다. 1994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협연으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바르토크 바이올린협주곡 음반은 그라머폰상을 수상했다. 장영주와는 브람스의 바이올린협주곡 음반을 녹음했으며, 곧 쇼스타코비치의 협주곡을 녹음할 예정이다. 그는 차세대 세계 작곡계를 이끌어나갈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재독 작곡가 진은숙을 지목하기도 했다.
“정경화와의 인연은 30년이 넘습니다. 그분은 작품에 대한 직관이 뛰어난 분이어서 항상 감탄하게 됩니다. 레퍼토리도 넓어 연주 못하는 곡이 없죠. 사라 장(장영주)은 놀라운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더없이 유쾌한 소녀여서 항상 기분 좋게 협연에 임합니다. 진은숙의 경우 매혹적인 상상력을 가진 작곡가지요. 악보 첫 장만 봐도 모든 소리가 제각기의 역할을 하고 있죠. 11월이면 이렇게 좋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나라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벌써 제 마음이 설레네요.”
그는 “무역회사를 경영했던 아버지가 한국 대만 홍콩 등을 돌아다녀, 어릴 때 한국제 장난감을 갖고 놀기도 했다”며 한국과의 색다른 인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40분으로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후 연습이 예정된 래틀 경은 “자, 그럼 서울에서 봅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음악가들도 연주를 통해 청중에게서 배웁니다. 음악가들 사이에 한국 청중은 열정적이고 진지한 청중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1월에는 이런 훌륭한 청중에게서 많이 배우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베를린=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사이먼 래틀 연보
△1955 영국 리버풀 출생
△1971 런던왕립음대 입학 (지휘 전공)
△1974 존 플레이어 국제 지휘 콩쿠르 우승
△1977 영국 글라인드본 음악축제 데뷔
△1980 영국 버밍엄시 교향악단 수석지휘자 겸 음악고문 취임
△1987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C.B.E.) 작위 받음.
‘Sir(卿)’로 호칭
△1993 그라머폰상 ‘올해의 예술가상’ 수상
△1999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 직접선거로
차기 음악감독에 선출됨
△2002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