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금융 정책에 대한 유럽의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영국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3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이 은행의 외국인 이사 수를 제한하려는 한국의 은행법 개정안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려는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고 자체 입수한 EU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FT는 또 "외국 투자자들은 금융감독원의 '주식대량보유보고제도'(5%룰)에 대해서도 불만을 보이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 신문은 지난달 31일에도 5%룰이 '정신분열증적(schizophrenic)'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바 있다.
정부는 FT의 이 같은 보도가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왜곡했을 뿐 아니라 금융 정책에 대한 의도적인 개입이라며 적극적인 대응을 추진하고 있다.
▽엉뚱한 '은행 이사 수 제한' 비판=FT는 3일자 기사에서 "EU는 한국의 서비스 교역에 관한 WTO 일반 협정에서 은행 이사의 국적 제한을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인 이사 규제를 담고 있는 은행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WTO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신문은 또 "EU의 이 같은 움직임은 (한국의) 반(反)외국인 정서가 외국인을 타깃으로 한 불공정한 정책 변동을 부추기고 있다는 우려가 늘면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국에서 은행의 이사 수 제한이 논의되기 시작한 건 작년 11월부터다.
윤증현(尹增鉉) 금융감독위원장은 당시 FT와의 인터뷰에서 "국내 은행의 외국인 이사 수가 이사회의 과반수가 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말했다.
이는 외국인 소유 은행들이 가계 대출에만 치중하는 등 금융회사 본연의 기능과 안정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WTO와의 금융관련 양허안에서 이사 수 제한 관련 내용은 빠져 있어 법제화보다는 관행으로 정착시킨다는 방침이다.
현재 국회에 의원입법 형식으로 상정돼 있는 은행법 개정안도 이 같은 한계 때문에 통과되기 어렵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반면 FT는 관행화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다.
FT는 "법적 요건이 없음에도 금감위가 최근 제일은행을 인수한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에 새 이사진의 절반을 한국인으로 하도록 요구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영국도 금융감독청(FSA)의 관행을 통해 외국 금융회사에 대해 3명 이상의 이사진을 구성토록 하고 이 가운데 1명 이상은 내국인으로 선임토록 하고 있다.
또 미국은 관련 법률에 따라 은행의 이사는 선임 1년 전부터 은행 소재지에서 100마일 이내에 살아야하는 엄격한 거주지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5%룰' 원색적 비난=FT는 지난달 31일자에서 정부가 최근 개정한 5%룰을 '경제 민족주의'이며 가혹한 제도라고 힐난했다.
5%룰은 경영 참여 목적으로 상장사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면 금융감독당국에 신고토록 하는 제도다.
미국 일본은 물론 영국(3%룰)도 채택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의 제도는 미국과 비교해 훨씬 느슨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양대 이상빈(李商彬·경영학) 교수는 "미국은 보고 이후 20일간 의결권 행사를 금지하지만 한국은 5일에 불과하다"며 "자금 조성 내역도 미국은 앞으로 사용 예정인 자금까지 신고해야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2일까지 5%룰에 따른 주식보유보고서를 접수한 결과 소버린자산운용이나 헤르메스펜숀즈매니지먼트 등 그간 '단순투자'라고 주장하던 외국계 펀드들이 '경영참여'로 보유 목적을 바꿨다.
하지만 이들은 자금 조성 내역을 대부분 '자기 자금'이라고만 기재해 명확한 출처 파악에는 한계를 드러냈다.
또 허위보고 등에 대해서도 뚜렷한 처벌 조항이 없어 제도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숨겨진 의도 있나=한국 정부는 FT의 '한국 때리기'가 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저의를 품고 있다는 의혹을 내비치고 있다.
금감위 관계자는 "SCB와 헤르메스 등 영국계 은행과 펀드의 한국 투자가 늘고 있어 영국에 근거지를 둔 FT가 한국 금융당국을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감위 관계자는 "유럽계 투자자들이 그간 한국을 '한수 아래'의 국가로 봐오다 이번에 금융 관련 규제가 강화될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저지하려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금감위는 이에 따라 FT를 비롯한 유럽 언론들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실제로 지난달 31일자 기사에 대해서는 이번 주 중 FT에 반론보도문을 게재키로 했다.
다만 3일자 기사는 EU 보고서를 인용한 만큼 즉각적인 대응은 자제키로 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