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리에게는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입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를 비롯한 중국 당국자의 입에 더 신경을 쓴다.” 글로벌 금융회사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가 몰려있는 홍콩에서 만난 한 글로벌 금융회사 임원의 말이다. 지난해 4월 긴축정책을 시사하는 원 총리의 발언으로 전 세계 주가가 폭락하는 경험을 한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상하이(上海)의 최대 번화가인 난징루(南京路)에 지난해 루이뷔통, 까르띠에, 제냐 아르마니 등 명품(名品) 매장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까르띠에는 앞으로 3년간 중국에 15개의 점포를 추가로 개설할 예정이다. 프라다는 2008년까지 중국 내에 30개 점포를 개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른바 ‘서우다이(首代·수석대표의 줄임말)’를 겨냥한 것이다. 외국계 기업 관리자를 지칭하는 신조어인 서우다이는 신흥 중산층의 대명사. 중국 국가통계국은 현재 전체 인구의 5%인 6500만 명이 중산층에 해당하지만, 2020년엔 전체 인구의 45%인 6억3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 2020년 中중산층 6억명
지난달 24일 인도 뭄바이 시내에 있는 코퍼침니 레스토랑. 뭄바이 관광청 소속 공무원인 데비 스리드하르 씨는 은행원인 남편, 두 아들과 함께 현대자동차가 현지에서 생산한 상트로(‘아토스’의 현지 브랜드)를 타고 식당에 왔다. 상트로 가격은 39만 루피(약 930만 원). 스리드하르 씨 같은 인도 중산층은 약 25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구매력을 바탕으로 3∼4년간 인도 자동차 내수시장은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120만 대 규모로 벌써 한국 내수시장 규모에 육박했다. 2010년엔 독일, 2012년엔 일본을 따라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인도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 금융업, 미국-유럽 독주 퇴조
아시아 경제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성장하면서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지고 있다. 그동안 글로벌 스탠더드(세계 표준)는 아메리칸 스탠더드(미국 표준)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2020년이 되면 아시안 스탠더드(아시아 표준)가 아메리칸 스탠더드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 부상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미국과 유럽의 독무대였던 금융업에서도 아시아의 부상(浮上)이 뚜렷하다. 한국은행 윤승일(尹勝一) 홍콩사무소장은 “영국 런던의 골드만삭스 딜러들이 아시아 애널리스트들에게 미리 시장 전망을 물어보고 투자할 정도로 아시아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 中, 3세대 이통표준 ‘마이웨이’
중국은 무선랜(LAN) 암호코드로 WAPI, 제3세대 이동통신 표준으로 TD-SCDMA를 각각 채택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둘 다 중국이 자체 개발한 것. WAPI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원천 기술을 갖고 있는 현재의 국제표준과는 호환성이 없다.
따라서 기존 무선인터넷 업계가 중국 시장에서 영업하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중국 표준을 따를 수밖에 없다. WAPI에 맞지 않는 제품은 중국에서 생산, 유통, 반입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차세대 이동통신인 3세대 이동통신 표준은 현재 미국의 CDMA2000과 유럽이 중심이 된 WCDMA로 양분돼 있었으나 중국의 가세에 따라 3강(强) 구도로 바뀔 전망이다.
중국이 독자 표준을 정하려는 것은 자체 내수시장이 워낙 커 외국에서 만든 표준을 굳이 채택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에 따른 것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올해 2월 중국의 TD-SCDMA 표준에 맞춘 휴대전화를 개발해 중국 정부에 이를 기증하는 행사를 가졌다.
국제표준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이처럼 아시아의 입김이 커지고 있다. 특히 정보기술(IT), 물류, 의료 등의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인도 증권감독원의 D 찬드라 총국장은 “세계 경제를 이끌 ‘친디아’(Chindia·중국과 인도를 합친 말)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한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 팔레트 표준기구 공동설립 추진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공동 대응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은 이달 중순 서울에서 팔레트 표준기구를 설립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갖는다. 팔레트는 수출입 화물을 지게차로 옮길 때 화물 밑에 넣는 받침대. 팔레트 규격은 현재 국가마다 제각각인데 규격이 통일되면 화물 선적과 하역시간이 단축돼 물류 효율이 크게 높아진다.
동북아 3국은 서울 회의에 이어 아시아 통합 물류시스템 구축도 논의할 예정이다. 이렇게 될 경우 결국 미국이나 유럽기업도 아시아의 규격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으로 국제 해운업계는 보고 있다.
한중일(韓中日) 3국은 또 2002년 ‘동북아표준협력체(S-Dialogue)’를 구성해 △건강카드와 보험청구 등 의료 정보 △고령자 및 장애인 서비스 등을 표준화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의료 정보 표준이 단일화되면 한국인이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도 큰 불편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들 3국은 2010년 실용화 예정인 4세대 휴대전화에서 사용될 주파수 대역을 통일하기 위한 논의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민병석(閔丙錫) 수석연구원은 “국제표준 시장에서 아시아의 영향력 증대는 갈수록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각국 자본 “중국-인도로 가자”▼
올해 초 인도의 ‘경제수도’인 뭄바이 시내 남쪽 고급주택가에 있는 35평 규모 아파트의 분양가는 한국 돈으로 10억 원을 넘었다. 2003년 기준으로 인도의 1인당 평균 국민소득은 543달러 달러(약 55만 원). 같은 해 한국(1만2646달러)의 2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10억원이 넘는 아파트 값이 인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 수 있다.
중국 상하이도 마찬가지. 최근 중국 정부의 강력한 투기억제대책으로 오름세가 주춤해졌으나 도심의 상당수 아파트 값은 1년 새 두 배로 올랐다. 뭄바이와 상하이의 부동산 가격 급등은 기본적으로 돈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현재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6099억 달러로 1년 전(4033억 달러)보다 2066억 달러 늘었다. 이 가운데 부동산과 주식 등에 투자하기 위한 투기성 자본(핫머니)이 400억∼500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중국에는 현재 노무라증권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등 외국의 85개 증권 및 투자회사가 진출해 시장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인도의 외환보유액도 올해 2월말 현재 1357억 달러로 전년 말보다 392억 달러 증가했다. ‘인도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는 뭄바이의 달랄스트리트는 요즘 투자 열기로 뜨겁다. 지난달 취재팀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기업공개를 앞두고 회사의 실적과 전망을 소개하는 홍보용 전단지가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인도인들의 돈도 높은 투자 수익을 찾아 인도행 물결에 합류하고 있다.
한편 올해 2월 말 현재 세계 외환보유액 1∼5위는 일본 중국 대만 한국 인도. 7, 8위도 아시아의 홍콩과 싱가포르다.
▼특별취재팀▼
▽경제부=
권순활 차장
공종식 기자
차지완 기자
▽국제부=
김창혁 차장
이호갑 기자
황유성 베이징특파원
박원재 도쿄특파원
김승련 워싱턴특파원
▽사회부=유재동 기자
▽교육생활부=길진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