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5일 발표한 중학교 교과서 검정결과 후소샤의 ‘새로운 역사교과서’ 합격본은 한일관계사를 여전히 심각하게 왜곡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 정부의 일본교과서 분석팀은 후소샤 교과서에서 문제가 된 30곳 중 5군데가 개악됐으며, 현행 그대로 유지된 곳은 17군데, 다소나마 개선된 곳은 8군데라고 밝혔다. 다른 7종의 역사교과서에서는 개선된 부분은 없으며 개악된 경우가 2곳, 현행 수준 유지가 9곳으로 분석됐다.
국내 전문가들은 일본 교과서의 역사 왜곡이 더욱 교묘하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개악된 부분=후소샤 교과서에는 2001년판에 없던 별도 칼럼 ‘조선의 근대화와 일본’이 실렸다.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일본’이라는 신청본의 노골적인 제목은 완화됐으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로 근대화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려는 의도가 보인다.
또 ‘중국은 구미 열강의 무력에 의한 위협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고 중국에 조공했던 조선도 마찬가지’라고 조선을 비하하면서 은근히 일본의 우월성을 앞세우고 있다.
2001년 검정과정에서는 조선을 중국의 복속국 조공국으로 표현했던 것을 삭제하고 ‘중국의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하에 있었다’로 바꿨다. 그런데 이번 2005년 합격본에는 다시 ‘중국에 조공했다’는 식으로 당시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더욱 낮추고 있다.
고대사 영역에서는 2001년판에 없던 한사군의 하나인 대방군을 언급하면서 그 위치를 현재 서울 인근으로 서술했다. 이는 검정과정에서 수정 없이 그대로 실렸다. 그러나 대방군의 위치는 황해도 일대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한반도에서 고대문화가 전수된 것도 ‘야마토 조정이 조선반도의 정치에 적극 관여한 결과 조선반도를 통해 중국의 앞선 문화가 일본에 받아들여졌다’고 아전인수로 설명하고 있다.
교과서 분석팀에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합격본에서 조선을 류큐(琉球·현 오키나와)와 에조치(蝦夷地·현 훗카이도)처럼 훗날 일본의 영토가 된 곳과 묶어서 설명한 구성상의 문제도 교묘한 개악 사례 중 하나다.
이 밖에 교이쿠슛판(敎育出版) 교과서 합격본은 일본의 계획된 의도로 일어난 운요호사건(1875년)의 침략성에 대한 설명을 누락시켰고 시미즈쇼인(淸水書院) 교과서는 2001년판에 언급했던 일본군 위안부 내용을 삭제했다.
▽현행 유지=후소샤 교과서는 2001년 한국 정부의 개선 요구를 받았던 내용 중 17군데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고대사 영역에서는 일본이 고대 한반도에 임나라는 거점을 두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계속해서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 또 한국사에서 고조선을 누락하고 낙랑군에서부터 시작하는 듯한 지도를 계속 싣고 있으며 백제와 신라의 건국 연대를 4세기경으로 의도적으로 늦추고 있다.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하게 된 데는 조선에 귀책사유가 있다는 듯한 기술과 러-일전쟁의 원인이 러시아의 도발에 있다는 주장도 여전했다. 식민지 수탈을 식민지 개발로 미화하거나 군위안부 사실을 누락한 점, 간토(關東)대지진의 책임을 일본 정부에 두지 않는 기술 등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 밖에 왜구에 조선인이 많이 포함돼 있다고 기술한 점, 조선의 표기를 조선국(이씨조선)으로 비하한 것, 임진왜란을 침략이 아닌 출병으로 묘사하고 조선통신사를 일본의 쇼군(將軍) 취임축하사절단으로 서술한 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개선된 부분=2001년에 비해 이번 합격본에서 그나마 개선된 부분은 후소샤 교과서의 8군데다. 그중 뚜렷하게 개선됐다고 평가받은 4개 부분은 △6세기 삼국시대의 국제역학 관계에 대한 부정확했던 묘사를 수정한 것 △신라와 백제의 일본 조공설을 삭제한 것 △조선을 문약한 문과사회로 묘사한 내용을 삭제한 것 △개화기 일본 정부가 조선의 중립화를 추진했다는 설명을 삭제한 것이다.
일부 개선으로 평가받는 4개 부분은 한반도 위협론의 표현을 완화하고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에 대해 친일파라는 표현을 삭제한 것, ‘동학의 난’을 ‘갑오농민전쟁’으로 표기를 바꾸고 가미카제(神風)의 유서 사진을 삭제한 것이다.
기타 역사 교과서(7종) 중 개악 부분출판사쟁점2001년판 2005년 검정합격본분석의견교이쿠슛판(敎育出版)강화도사건1875년 일본은 강화도사건을 계기로 페리의 수법을 흉내 내 군함을 거느린 사절을 보내 조선에 압력을 가하고 다음 해 일조수호조규를 체결해 개국시켰다. 이 조약은 조선에는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또한 조약에서는 조선이 독립국으로 돼 있지만, 청은 조선을 종속국으로 간주하고 있었다.일본의 군함이 서울 근처 강화도에 근접해서 측량했기 때문에 조선의 포대로부터 공격을 받아 일본 측이 반격하여 점령한 사건이다.(121쪽 주1)강화도사건의 원인에 대해 강화도 근해에서 측량했다는 이유로 조선포대로부터 공격을 받고 일본 측이 반격한 것으로 서술해 계획된 침략행위를 은폐
시미즈쇼인(淸水書院)군대위안부·강제징용·황민화정책전지(戰地)의 비인도적 위안시설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과 대만 등의 여성도 있었다. 게다가 조선과 대만에도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본병사로 전쟁에 동원했다. 국내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을 강제적으로 연행해 탄광과 광산 등에서 일을 시켰다.(203쪽) 군대위안부 관련 서술 삭제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