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이다. ‘스완네 집 쪽으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편으로, 그러한 모색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작품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 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적물은 그렇게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물론 지난 세월의 일들을 기록에 의지하여, 또는 다른 수단의 도움을 얻어 인위적으로 기억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우리 개체 고유의 실존적 체험과는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러한 사건들의 특징은 온갖 유행이념이나 잡다한 교조(敎條), 주입되거나 들쑤셔진 억지감정 등에 의해 빚어진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속성상 다소간의 거짓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부활도 있다. 아직 봄바람 차가운 어느 날 오후 양지쪽 밭두렁을 무심히 걷던 중 문득 엄습하는 황홀감에 넋을 잃고 걸음을 멈추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눈물이 왈칵 치솟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참냉이 잎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 다음 순간이다. 그리고 나물 캐던 누나를 따라다니던 시절이, 냉이죽조차 먹지 못해 누렇게 부황에 떠서 죽어 가던 이들을 대동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다시 한순간이 더 지나서이다. 또한 어떤 때는 어느 묏부리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지만, 아무 추억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활된 것의 정체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명명한 그 시절 또한 단순한 과거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다. 지극히 하찮은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 부활된 그 상태, 비등(沸騰)성 황홀감을 수반하는 그 찰나적 상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은 일체의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자신의 초월적 본질을, 다시 말해 불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삶의 허망한 실상을 절감한 이들에게는 작은 위안이 될 수도 있고, 존재의 새 국면을 보여 줄 수도 있는 작품이다. 문학 및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소설로서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는 세월의 여과작용을 더 기다려야 할 듯하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및 ‘스완네 집 쪽으로’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경우가 많은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스완 씨 댁 쪽으로’가 정확한 번역이다.
이형식 서울대 교수·불어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