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털을 단 버드나무 씨앗이 무심하게도 이리저리 흩날리는 봄날 아침이었다. 30년 전인 1975년 4월 9일. 서울 서대문 구치소 앞은 눈물과 통곡으로 가득했다.
“신부님이 죽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죽었잖아요?”
이날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처형된 8명의 시신이 시간차로 한 구씩 실려 나왔다. ‘형장의 이슬’이라는 비유가 가슴을 헤집는 갑작스러운 새벽 처형이었다. 가족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몸부림쳤다.
지방에서 올라 온 가족들은 자신들을 도와 온 함세웅(咸世雄) 신부의 집전으로 서울 응암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장례를 치르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시신을 빼앗아 미리 지정한 장지로 가져갔다.
한 가족이 실랑이 끝에 시신을 차에 실었다. 20분쯤 달렸을 때 경찰관이 차를 에워쌌다. 가족들은 시신을 실은 차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바퀴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윽고 크레인이 나타나 차를 번쩍 들었다. 시신은 벽제 화장장에서 가족들 없이 화장되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은 전날 8명의 사형이 확정된 뒤 단 하루 만에 일어났다. 선고 이후 최소 3년 이상이 흐른 뒤 형을 집행하는 관례에 비춰 보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표면적으로 좌파 혁신계 인사들의 정부 전복 모의사건이었다. 전직 기자, 양조장 사장, 여고 교사 등이 모의해 10년 전에 적발, 해체된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으며 이들이 1974년 대학가 시위를 주도한 ‘민청학련’의 배후였다고 수사를 맡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밝혔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고인들은 “전기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문을 끊임없이 받았으며 증거는 날조됐다”고 항변했다.
지금도 당시 수사책임자들은 “고문이나 조작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변론 도중 ‘사법 살인’ 중단을 요구하다 구속된 강신옥(姜信玉) 변호사는 “제대로 재판을 받았더라면 2, 3년의 형을 선고받았을 사람들이 유신에 대한 도전을 분쇄하려는 정권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라고 회고한다. 유족들은 “죽은 사람이 어떤 사상을 가졌든 대부분의 기소내용은 조작된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2월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이 사건의 재조사에 착수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