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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미래와 도전]변화와 함께 오는 위기

입력 | 2005-04-12 18:39:00


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아시아 6개국 순방의 첫 일정으로 인도를 방문하던 지난달 중순, 인도 뉴델리 정가는 나렌드라 모디 구자라트 주지사의 미국 비자 문제로 시끌시끌했다. 미 국무부가 모디 주지사의 비자 발급을 거부한 것이었다.

모디 주지사가 2002년 힌두-이슬람교 종교분쟁이 발생했을 때 구자라트 주에서 2000여 명의 이슬람교도가 대량 학살된 것을 방조했다는 게 미국 측의 거부 이유였다.

인도 정계는 발끈했다. 모디 주지사의 소속당인 야당 BJP(힌두 근본주의를 표명하는 당)는 물론 집권당의 만모한 싱 인도 총리까지도 미국 정부에 항의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라크전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은 못 믿을 나라다. 자기가 필요하면 특정 국가를 적으로 규정하고, 나중에는 침략까지 한다.” 취재팀이 사석에서 만난 인도 지식인들은 미국을 아예 ‘못 믿을 나라’로 단정했다.

그러나 라이스 장관이 다녀간 직후 워싱턴에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인도를 ‘21세기 세계 지도국(Major World Power)’의 대열에 올려놓기 위한 보다 광범위한 전략적 협력관계를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워싱턴의 한 고위관리는 “인도는 중국, 이란, 중앙아시아 등 주변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이를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중국 포위론’의 일환으로 해석했지만, 인도의 생각은 다르다.

● 친디아 파고다(Chindia Pagoda) 10일 인도를 방문한 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남부 방갈로르의 첨단 정보기술(IT) 도시를 찾은 자리에서 “인도의 소프트웨어와 중국의 하드웨어를 마치 파고다(탑)를 쌓듯이 결합시키면 두 나라는 ‘아시아의 세기’를 열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IT 산업분야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었지만, 중국(China)과 인도(India)가 합치면 ‘아시아의 세기’라는 금자탑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 포함돼 있었다.

양국은 또 반세기 이상 끌어온 국경분쟁을 종식시키기로 하는 한편 거의 30개에 이르는 정치, 경제, 문화협력 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

양국의 ‘친디아 파고다 선언’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인도와 중국이 미국의 세계전략에 휘둘리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는 점이다. 2010년이면 독일을, 2020년이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을 추월한다는 중국과 매년 6%씩 성장할 경우 2050년에는 중국을 따라잡는다는 인도의 ‘다극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 중국, 아직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중국으로서는 ‘친디아 파고다 선언’을 통해 인도와 경제적 윈윈 관계를 정착시켰을 뿐 아니라 안보 면에서도 국경의 서쪽을 안정시킴으로써 2020년의 ‘전면적 샤오캉(小康·경제적 문화적 중산층) 사회’ 건설 목표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됐다.

문제는 동아시아다.

데이비드 스타인버그(아시아연구소장) 조지타운대 교수는 “21세기 초엽 동아시아 정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만한 변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한마디로 “중국과 미국 간 관계 즉, 중국의 부상과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아니겠느냐”고 답했다.

동아시아의 최대 현안인 대만의 독립 움직임과 북한 핵 위기, 그리고 영토 및 역사 분쟁에서 촉발된 민족주의 열풍은 중국의 ‘2020 프로젝트’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특히 대만 문제와 북핵 위기가 폭발하면 이라크전은 ‘경찰 진압 작전’쯤으로 보일 만큼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제임스 호지 포린어페어스 편집장). 미국이 개입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요즘 화평굴기(和平굴起·평화롭게 우뚝 일어선다)라는 말을 잘 안 쓴다. 아직은 도광양회(빛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할 때라고 생각한다.

학자들 사이에선 대신 ‘화평발전(和平發展)’이란 말이 돌고 있다. 미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야지, 전략적 경쟁자가 돼서는 글로벌 파워는 고사하고 샤오캉 사회 건설도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다.

● 대리 균형자 일본

라이스 국무장관은 지난달 중순 일본 조치(上智)대 강연 때 이런 말을 했다.

“21세기의 아시아와 태평양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두 가지 즉, 개방(Openness)과 선택(Choice)이 될 것이다. 닫힌 사회·경제가 아니라 개방 사회, 그리고 개방 사회의 책임감을 받아들이는 선택이 21세기 아시아의 두 가지 주제가 될 것이다.”

라이스 장관은 이어 미국과 일본은 이미 그런 ‘선택’을 했으며, 미국이 일본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균형자 역할을 해온 미국은 21세기 들어 점점 일본에 그 역할을 ‘위임’해가고 있다.

한국이 한미일 동맹구도를 거부하면 일본의 ‘동아시아 대리 균형자’ 역할은 보다 극명한 형태로 강화될 것이다.

로버트 아인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노무현 대통령이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발언을 종합해 보면 한국은 미일 동맹의 축에서 전략적으로 거리를 두고 대륙의 열강들과 함께하거나 중간적 입장을 취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스옌훙(時殷弘·미국연구소장) 중국 런민(人民)대 교수는 “2020년쯤 가면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 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 경우 미일 동맹을 한 축으로 하고, 중국과 남북한이 정치적으로 ‘반일 동맹’을 형성하는 구도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의 동북아▼

의제1-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방안.

의제2-동북아다자안보협력체 창설 구상.

2월 16일 오후 서울 정부중앙청사 별관 3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재외공관장회의에서는 이 두 주제를 놓고 2시간 넘게 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의 대부분은 북핵 문제에 집중됐다. 동북아다자안보협력체 문제에 대해서는 100여 명의 대사들에게 “임지로 돌아간 뒤 의견이 있으면 본부로 보내 달라”는 당부가 사실상 전부였다.

그러나 아시아는 어느 지역보다 다자안보협력이 절실한 곳이다. 정치 경제 문화 인종 종교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상존하는 데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전과 미소(美蘇)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통합의 역사’보다는 ‘분열의 역사’가 이 지역을 지배해 왔기 때문에 분쟁 발발 가능성이 그만큼 더 높다.

1994년 7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이 주도해 창설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은 탈냉전시대의 지역 안보 불안을 다자 대화로 최소화해 보자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ARF는 역내(域內)의 유일한 정부 간 안보협의체지만 유럽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담보하고 있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비교하면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특별취재팀이 최근 입수한 ‘동북아다자안보협의체 구상’이란 제목의 한국 외교통상부 내부 자료에 따르면 ‘ARF는 북핵 문제 같은 동북아 차원의 공통안보 관심사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문서는 특히 동북아 정세에 대해 “중국의 부상, 일본의 군사대국화, 역내 민족주의 대두, 한미일 남방축과 북-중-러 북방축의 대립 재연 같은 전략적 불안 요인이 증대하고 있고 지역 내 의사소통 부재에 따른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별취재팀 명단▼

▽국제부=김창혁 차장

황유성 베이징특파원

박원재 도쿄특파원

이호갑 기자 부형권 기자

김정안 기자

▽경제부=권순활 차장

공종식 기자 차지완 기자

▽사회부=유재동 기자

▽교육생활부=길진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