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섬유공장이 밀집한 공단에서는 섬유 기계를 뜯어내는 소리가 끊이질 않아요.”
해운회사와 섬유회사를 연결하는 화물 중개 업체인 D해운의 P 사장은 지난해부터 일감이 많아졌지만 마냥 즐겁지는 않다.
수출 화물이 섬유제품에서 제품을 생산하던 중고 섬유기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라면 2∼3년 안에 일감이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 사장은 “섬유회사들이 기계를 뜯어내는 이유가 신형으로 교체하거나 해외공장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중고로 기계를 수출하고는 문을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에도 대구 이현공단의 계림염색공업, 경북 영천시의 대영 등 중견 섬유업체들이 회사 정리 차원에서 기계를 해외에 팔아치웠다”고 전했다.
한때 ‘메이드 인 코리아’의 대명사였던 섬유산업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중국, 파키스탄 등 후발국가와의 경쟁에서 밀린 국내 업체들이 연쇄 도산하면서 생산 수단인 기계가 대거 해외로 나가고 있다.
▽늘어나는 섬유기계 수출=한국섬유기계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섬유기계 수출액은 11억1296만 달러로 2003년(9억2611만 달러)보다 20.2% 증가했다. 올해 1월 수출액(9342만 달러)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6% 늘어났다.
이 통계에는 중고 기계 수출이 별도로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관련업계에서는 섬유기계 수출 증가가 중고 기계 유출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한국섬유기계협회 문승옥(文昇玉) 상무는 “정확한 비중은 알 수 없지만 수출액 기준으로 중고 기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8%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수출 물량(컨테이너 기준)으로 따지면 중고 기계의 비중은 훨씬 높아진다. 외국으로 나가는 중고 기계는 대부분 경매를 통해 헐값으로 브로커들에게 낙찰된 뒤 수출되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섬유 생산지인 대구 지역 섬유업체들이 보유한 기계는 외환위기 이전 20만 대에서 최근에는 3만 대로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수출 지역과 예상되는 후유증=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업체들이 섬유기계(중고 포함)를 가장 많이 수출한 나라는 중국으로 연간 수출액이 4억1188만 달러였다.
이어 △베트남 8221만 달러 △방글라데시 4368만 달러 △인도 3973만 달러 △인도네시아 3483만 달러 △파키스탄 2015만 달러 순이다.
전문가들은 인건비와 원자재 값 상승 등으로 국내 섬유산업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내 섬유기계가 유출되면 국내 섬유시장이 후발 국가에 잠식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대우증권 이수혜(李守醯) 연구위원은 “국내 업체가 헐값에 팔아치운 중고 기계가 국내에 남아있는 섬유 업체들의 가격 경쟁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부메랑’ 효과가 빚어질 수 있다”며 “고부가가치 패션 산업으로 빨리 전환하는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진흡 기자 jinhup@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