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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교황의 역사’ ‘바티칸 제국’

입력 | 2005-04-15 16:47:00


◇교황의 역사/P G 맥스웰 스튜어트 지음·박기영 옮김/292쪽·2만8000원·갑인공방

◇바티칸 제국/루트비히 링 아이펠 지음·김수은 옮김/352쪽·1만4800원·열대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은 여러 측면에서 지난해 6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죽음과 비견된다. 두 사람은 1980년대 세계 정치를 풍미한 거인이었고, 암살 기도를 기적적으로 피했으며, 세계 공산주의 몰락의 숨은 주역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말년에 각각 파킨슨병과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한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레이건 전 대통령은 세계 최강대국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반면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구 900여 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바티칸)의 수반이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 사진 제공 열대림

미국 대통령은 에어포스 원이라는 전용기를 타고 수많은 기자들을 데리고 다니지만 교황은 전용기도 없고 수행기자는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 또 미국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러시아 중국 일본 북한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국방예산으로 무장한 군사력을 지녔지만, 교황에게 군사력이라고는 110명의 스위스 위병이 전부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은 레이건 전 대통령의 죽음보다 더 큰 뉴스가 됐다. 이를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베드로에서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모두 264명의 교황들의 행적을 담은 ‘교황의 역사’를 읽어보면 교황의 죽음이 대대적 애도의 대상이었던 때는 드물었다. 초기에는 박해받는 소수파 지도자로 순교자가 많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는 정치적 암투와 금전적 거래에 물들었다.

갈리스토 1세(재위 기간 217∼222년)는 사기와 횡령의 전과자였고, 비질리오(537∼555년)는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첼레스티노 4세(1241년)가 겨우 10명의 추기경들이 참석한 콘클라베(교황 선거회의)에서 두 달 반 만에 가까스로 선출됐으나 17일 만에 숨진 사실은 교황 선출 이면의 추한 권력욕을 드러낸다. 무더위 속에서 진행된 이 콘클라베는 추기경 한 명이 죽고 다른 추기경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뒤에야 합의에 이르렀다.

여러 명의 정부(情婦) 아래 최소한 9명의 사생아를 뒀던 알렉산드르 6세(1492∼1503년)는 도덕적 이중성의 상징이다. 교황에 선출되자마자 ‘하느님이 나에게 교황 직을 선물로 주셨으니 마음껏 즐기자’며 흥청망청 돈을 쓴 레오 10세(1513∼1521년)는 방탕의 증인이다.

역대 교황 중 성인으로 추앙된 이가 78명, 복자로 추앙된 이가 8명에 불과한 이유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대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종교적 영성과 정치적 지도력을 동시에 발휘한 교황은 레오 1세(440∼461)와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 둘뿐이다.

410년의 로마 함락, 1054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리, 1517년 마르틴 루터의 면죄부 판매 비판으로 인한 신교도 혁명, 1870년 바티칸 시(서울 창경궁만 한 넓이)로 교황령의 축소….

이런 끊임없는 위기 속에서 교황청이 2000여 년이나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속권력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유지한 정치·외교력에 있었다. 교황은 6세기까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5대 주교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분열 후 펼쳐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양대 체제 간의 시소게임, 동방교회의 분리 이후에도 계속되는 유럽 황제들의 회유와 협박 속에서 터득한 생존능력을 일종의 조직 IQ로 축적 발전시켰다.

‘바티칸 제국’은 특히 1870년 교회국가의 몰락 이후 지금까지에 초점을 맞춰 어떻게 바티칸이 유엔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됐는지를 분석했다. 그 바탕은 음모론자들이 말하는 재력이나 정보력이 아니다. 세속적 권력을 포기하는 대신 외유내강의 ‘소프트 파워’를 육성한 데 있었다.

20세기 교황들은 진화론, 유물론, 남녀평등, 산아제한 등 현대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내부개혁에는 진중한 소걸음 행보를 펼쳤다. 반면 세계평화나 외교문제에서는 놀라운 유연성을 발휘해 왔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라크전쟁에 즉각 반대성명을 냄으로써 서유럽 정치지도자와 유엔 사무총장, 이란 특사까지 교황 알현을 위해 바티칸으로 날아오게 한 대목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단기간 대중적 인기에 영합할 우려가 있다는 민주주의에 비해 교황의 종신제와 그 선출의 집단합의제가 지닌 장점도 있다. 장기간 일관된 리더십의 발휘를 뒷받침하면서 그 실패를 보완할 새로운 엘리트의 충원을 집단적 지도력 속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원제: Chronicle of the popes(1997)

Weltmacht Vatikan(200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