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 바우쉬는 한국을 소재로 한 ‘신작 2005’에서 “빨리빨리”를 외치며 질주하는 한국인의 역동성과 변화에 대한 열망, 그에 따른 피로도 함께 표현했다.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독일의 세계적 안무가 피나 바우쉬(65)가 또 하나의 걸작을 만들었다.
17일(현지 시간) 독일 부퍼탈에서 프리뷰로 선보인 ‘신작(新作) 2005’에서 무용과 연극을 넘나드는 특유의 연출 솜씨를 맘껏 뽐낸 것. 부퍼탈 시 샤우슈필하우스의 740여 석에 꽉 찬 관객들이 전원 기립박수로 호응한 이 작품은 한국을 소재로 해 한국 팬들의 관심이 남다른 작품이다.
막이 오르면 두 남자 무용수가 얼굴을 맞대고 돌림노래를 하듯 휘파람을 주거니 받거니 불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소통’이 주요 테마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 2부 각 1시간 10분씩 소요된 이 공연은 오늘날의 한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들로 가득 찼다. 복잡한 도시에 매몰된 현대인, 바쁜 일상에 지친 샐러리맨 등을 형상화한 몸짓은 우울 권태 같은 단어들을 연상시켰다. 그런가 하면 앞치마를 두른 여자 무용수들이 남자 무용수들에게 실제로 물을 뿌려가며 등목을 해주는 모습은 정겨운 한국의 옛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장면이었다. 빨간 팬티만 입고 누워있는 남자 무용수를 출연진이 무수한 배춧잎으로 뒤덮어버리는 모습으로 김장을 표현한 대목에선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해 한국의 도시와 시골을 탐방하며 ‘한국적인 것’을 찾아 다녔던 피나 바우쉬는 신작에서 등목 풍습을 묘사했다.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한 이 작품은 피나 바우쉬가 1986년부터 시작한 ‘세계 도시-국가 시리즈’의 13번째 작품. 바우쉬와 단원들은 지난해 말 한국을 방문해 도시와 시골, 고궁, 비무장지대 등을 돌며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이번에 춤으로 옮겼다.
가야금 산조, 사물놀이 등을 모티브로 한 배경음악이 전편에 흐르는 가운데 김민기의 ‘가을 편지’, 김대현의 ‘자장가’ 등 한국 노래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춤과 어우러졌다. 바우쉬의 공연을 44번째 본다는 조지 빈켈만 씨는 “지금까지 본 바우쉬 공연 중 최고”라며 “특히 음악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16명의 무용수들은 격렬한 몸짓이나 무대를 종횡으로 휘젓는 달리기에서 정적인 움직임으로 곧장 넘어가는 대목에서도 호흡을 잃지 않았다. 이 무용단의 유일한 한국인 단원 김나영 씨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LG아트센터, 피나 바우쉬 부퍼탈 탄츠테아터, 주한 독일문화원이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수정 보완을 거쳐 6월22∼26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초연된 뒤 세계 순회 공연될 예정이다.
▼바우쉬 “한국인의 역동성, 그 비밀을 찾고 싶었다”▼
“아직 덜 익은 작품이에요.”
공연 직후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가진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대표이자 안무가인 피나 바우쉬(사진). 겸손한 자평과는 달리 객석 반응을 보며 만족한 표정이었다.
“1978년 처음 한국 공연을 하고 나서 20여년 만에 두 번째로 한국을 찾았을 때 그 변화상에 깜짝 놀랐어요. 변화를 일구어낸 한국인의 역동성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비밀을 찾는 심정으로 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무대 배경으로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암벽을 선택했고, 출연 무용수들의 드레스 색깔에도 빨강 초록 흰색 등 한국적 색채를 많이 가미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작년 방문 때 경험한 한국은 세밀함과 강함, 현재와 전통 등 대비되는 모습이 공존하는 곳이었다”며 “역동적 차원을 넘어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대목에선 한국인의 지친 인상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퍼탈(독일)=금동근 특파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