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감성 혹은 느낌으로 파악한 당대의 역사이다. 한국의 근대사를 감성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내 인식 영역에 수용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대소설사에 우뚝한 몇몇 작품을 읽어둘 필요가 있다. 채만식의 ‘탁류’는 한국 근대사를 파악하는 데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근대 한국의 초상을 한마디 느낌으로 포착한다면 ‘탁류’라는 말에 앞설 어휘가 없을 듯하다. ‘청류(淸流)’보다는 ‘탁류(濁流)’에 주목한 까닭은 탁한 역사의 흐름, 무뢰배(無賴輩)들이 횡행하는 현실의 실감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첫 줄은 ‘금강(錦江)…’이다. 줄을 바꾸어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게 째져 가지고는 …(중략)…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로 이어진다. 이렇게 서술자는 느긋하게 금강이 주는 느낌에서 글 읽기를 시작하라고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요 무대는 식민지 수출항 군산과 서울이다. 군산은 왜곡된 식민지적 근대화의 핵심이 되는 지역성을 지닌 곳이다. 지리적으로는 ‘탁류’가 흘러나가는 항구도시고, 근대화의 산물인 통신시설이 정비된 곳이며, 식민지 경제의 상징인 ‘미두장’이 운영되는 공간이다. 군산은 통신과 돈과 무질서와 혼란이 뒤엉킨 크로노토프(시공간)로서 이 소설의 주제를 상징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펼쳐지는 인간사를 훑어보고 나서 그 느낌을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주제는 느낌을 되새김질하면서 주입하는 이성의 타액(唾液)에 실려 나온다. 수은 위에 금이 뜨듯이.
우리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탕개가 풀려 흐느적거리며 탁류에 휩쓸리는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단작스러운 인간 정주사, 몰염치한 인간 고태수, 가증스러운 인간 장형보, 음흉한 인간 박제호, 그리고 자기를 지킬 만한 깨달음도 선한 싸움을 위한 의지도 결핍되어 있는 초봉이 등 속된 세계를 살아가는 속물 군상이다. 그런데 이런 속물들은 따져보면 식민지 체제에서 속물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인물들이다. 이런 판단은 탁류라는 ‘느낌’ 뒤에 진통을 수반하는 자성에서 비롯된다. 깨우침이 있는 독자는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스스로를 닦달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란 무엇인가’ ‘식민주의란 무엇인가’ ‘역사 전망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식민주의의 노예적 속성에 희생된 것이 초봉이의 삶이다. 식민지 경제구조 안에서 운영되는 가족을 앞세워 자기를 희생하는 초봉이의 태도는 그 체제가 주입한 노예근성의 다른 얼굴이다. 여기서 우리는 군사적, 경제적 수탈을 거쳐 정신의 노예근성을 심어 놓은 식민주의가 빚어내는 절망감의 원인을 알아낸 셈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왔다고 그 깨달음을 따라 실천할 시간 여유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비극은 비롯된다. 이 비극을 극복해 내는 데는 허구적 상상력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역사의 질곡에서 살인죄인이 된 초봉이의 앞길, 그것이 민족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을 보듬어 안고 살 길을 찾아 나서는 데는 작가와 독자의 상상적 전망이 유일한 길이다. 이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나서는 지적 모색이 소설을 읽는 이의 의무인 까닭은 그것이 역사에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한용 서울대 교수·국어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