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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김용희]21세기, 배설과 식욕의 역설

입력 | 2005-04-19 18:08:00


쥐를 없애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천장 위로 쥐들이 다니는 집들은 귀를 기울이시길! 쥐 한 마리를 잡아 쥐의 항문을 실로 꿰매 놓는다. 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배설을 하지 못한다. 거의 발광 직전에 이른다. 드디어 자기 종족을 잡아먹고 죽인다. 고양이 없이 쥐를 없애는 방법이다.

배설이 억압되자 식욕이 더욱 극에 치닫는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생리적인 순환을 막자 식욕이 배설인 양 발동하는 역상이다. 배설이 억압된 자들은 광폭해진다. 19세기 제국주의의 침략이 그러했고 히틀러의 파시즘이 그러했다. 히틀러는 생전에 배설 욕구에 시달렸다. 배설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극도의 오염공포증 때문이었다. 유대인을 일종의 사회 병균으로 매도한 것은 순수한 아리안 혈통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강박 때문이었다고 한다. 집시와 동성애자들을 함께 가스실에 넣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식욕으로 가득 찬 자들은 죽음이 그들을 멈추게 하는 그 순간까지 식욕을 멈출 수 없다. 욕망은 욕망하면 할수록 결핍만을 낳기 때문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허전해지는 자본주의의 과도한 탐식욕을 생각해 보라. 현란한 광고 속에서 새로운 상품은 끝없이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광고 화면 속 빛의 이미지들은 소비자를 잡아먹고 있다.

▼배설 억압되면 식욕 극에 달해▼

19세기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식민지 전쟁이 절정에 달한 시절이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뇌면서 20세기를 통과한 듯하지만 21세기의 우리는 여전히 침략적 국가주의와 패권주의의 위협 속에 놓여 있다. 일본 총리는 전범 위패가 봉안된 야스쿠니신사를 계속 참배하고 있으며 역사교과서는 계속해서 왜곡되어 뿌려지고 있다. 일본이 일으키는 이웃나라와의 영토 분쟁을 떠올리기 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력을 상기해 보자. 자본주의적 과잉 섭취의 나라들은 모두 물질주의의 횡포와 공격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군함과 전투기의 수, 군대와 첨단무기. 식욕은 더 왕성한 식욕으로 뻗어 간다. 더 많은 영토와 더 많은 힘과 더 많은 권력과 더 많은 영광을 원한다. 월트디즈니사의 영화 ‘라이언 킹’은 사자 왕의 혈통주의와 힘의 지속성을 보여 준다.

탐욕적인 식욕 속에서 진정한 자기 배설을 찾을 수 있을까. 최근 언론은 중국인이 일본을 규탄하는 데모를 보여 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파급으로 빈부 격차가 격심해지자 중국 당국이 국민의 욕구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해 데모를 방치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한국 언론은 중국인의 데모를 연일 보도하면서 대리 해소(배설)를 하고 있다. 독일 정부가 나치 전범에 대해 끝없이 용서를 구하는 데 반해 조금도 참회하지 않는 일본을 생각하면 이렇게라도 분노를 삭여야 할 일이다.

일본이 광폭해진 것은 배설이 억압되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의 칼은 엄격한 결단을 가르쳐 왔고 예의와 법도는 절제된 인공적 친절함을 가르쳐 왔다. 그러기에 일본은 참회를 배우기 전에 우선 용서를 배워야 한다. 엄격함 속에서 억압해 왔던 또 다른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에 남을 공격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배를 갈라야 할 할복의 칼을 상대에게 휘두르고자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폭식증’ 참회해야▼

하긴 굳이 남의 이야기뿐이랴. 우리도 더 많은 집과 더 많은 땅을 갖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어떻게 비우면서 움켜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식욕을 어떻게 진정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우리는 여전히 침략의 공격성과 그 잔재 속에 놓여 있다. 프랑스에 있는 우리나라 규장각 도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교황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과거 십자군전쟁에서의 종교적 만행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다. 21세기 우리의 화두는 진정한 자기 용서를 찾는 것이다. 자본주의과 제국주의의 폭식증에 대해 ‘참회’하는 것.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기름이 끼어 버린 것에 대하여 ‘자기 고백’ 하는 것. 그것이 몸의 순환과 천도(天道)를 되찾는 일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