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어느 날 70대 할머니가 서울역을 찾아 봉투 하나를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37년 전 생활이 너무 어려워 열차에 무임승차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 속죄하는 마음으로 열차운임을 갚기 위해 왔습니다.”
봉투 속에는 현금 30만 원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받게 된 서울역 직원들은 이름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간청했으나 그 할머니는 “죄인의 이름을 알아 무엇 하느냐”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37년간 가슴에 묻어 두었던 ‘빚’을 갚고 돌아선 그 할머니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과거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뒤늦게 고백하거나 남에게 진 빚을 몇십 배, 몇백 배로 갚는 ‘아름다운 참회’가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늘어나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다.
지난해 7월엔 경기 안산시에 사는 70대 부부가 대구의 동산의료원을 찾아 40여 년 전의 병원비라며 100만 원을 내놓았다.
당시 경북 칠곡군에서 살던 노부부는 생후 6개월 된 아들을 이 병원에 입원시켰다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병원비 9000원 중 6000원을 마련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병원 측이 이 돈을 받지 않자 이를 빚으로 알고 살아온 노부부가 뒤늦게 병원비를 갚은 것이다.
이 외에도 17년 전에 체납했던 전화요금 129만3800원을 갚은 어느 촌로의 얘기나 42년 전 이웃에게 빌린 2만3000원을 그 아들에게 500만 원으로 갚은 70대 할아버지의 얘기도 전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고의가 아니더라도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뜻하지 않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잘못은 감추고 싶고, 또 영원이 묻혀지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작은 잘못이라도 이를 참회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종교적, 국가적 과오를 참회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종교를 떠나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어려운 일을 해 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대희년(大禧年·예수 탄생 2000돌)을 맞아 과거 가톨릭이 저지른 과오들을 참회한 것은 가톨릭의 치부를 드러냈다기보다는 진정한 ‘종교 간 화해’를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숨겨진 딸이 있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국가정보원 직원들까지 동원됐다는 SBS의 보도로 최근 며칠간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김 전 대통령 측은 “왜 이제 와서 이런 주장이 나오고 보도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른바 ‘숨겨진 딸’의 친자(親子) 여부에 대해선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아 궁금증만 증폭시키고 있다.
몇몇 사람의 입 소문이 아니고 어차피 공론화된 마당이라면 당사자가 나서서 뭐라 얘기하는 게 떳떳하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이진녕 사회부장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