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이 건강하시기를 늘 기도합니다.” 어느 금융그룹 회장은 계열사 펀드의 고객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고객의 기도는 이기적이다. 수익 내 달라고 돈 맡겼는데, 최고경영자가 병치레라도 하면 펀드 성적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내 돈을 위해’ 회장의 건강도 중요하다.
이런 이기심은 정상이다. 도둑질 안 하고, 남 등치지 않는 다음에야 돈 불리겠다는 게 죄 될 리 없다. 경쟁적 경제동기(動機)를 인정하고, 사유재산을 지켜줘야 더 벌려고 덜 잔다. 그래야 부자가 늘고 부국도 된다.
회장은 고객이 고맙다. 건강을 빌어 주는 마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신뢰받고 있지 않은가. 고객은 숱한 펀드운용사의 실력을 재 보고, 믿음이 더 가니까 그 회사를 찾았을 터이다.
고객이 신봉하는 절대적 잣대는 수익률이다. 돈은 이에 따라 몰리거나 떠난다. 손실 입힌 뒤에 남 탓이나 변명하는 건 꼴불견에 헛수고다.
회장은 말을 아낀다. 실적으로 답한다.
돈 장사는 사람 장사다. 주가가 뛰어도 죽 쑤는 펀드매니저가 있고, 시장이 꺼져도 돈을 불려 주는 고수가 있다. 고수를 많이 모으고, 범재를 인재로 만드는 게 회장의 최대 임무다. 여기서 실패하면 건강을 빌어 줄 고객도 사라진다.
회장은 젊다. 하지만 스무 살 연장의 60대 후반 베테랑을 삼고초려(三顧草廬)로 모셔 온다. 반대로 가망 없는 30대 직원에겐 사표를 받는다. 사원들은 감이 빠르다. 회장이 말하지 않아도 이런 용인(用人)을 보고 움직인다. 저절로 일에 대한 충성심이 나온다.
▼“획기적인 것은 위험하다”▼
회장은 전횡(專橫)을 스스로 경계한다. 자신이 원조(元祖) 고수지만 독판(獨判)의 한계를 안다. 뜯어보면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다. 보완되기를 거부하는 독선적 리더는 위험하다고 깨닫는다.
사장이나 간부들에겐 가만히 있어도 두려운 존재가 회장이다. 그런 판이라 ‘네가 뭘 알아’ 몇 번 하면 ‘회장 코드’가 법이 되고 만다. 창조적 반대는 사라진다. 이는 망조(亡兆)다. 그래서 열린 경영, 위임하는 경영을 몸으로 보여 준다.
회장은 몸을 낮춘다. 자신이 샐러리맨 시절에 알았던 ‘더디게 가는 사람’을 지금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대하려고 애쓴다. 밥 사주는 자리에도 먼저 나가 기다릴 때가 많다. 바빠도 티를 안 낸다.
“획기적인 것은 위험하다.” 이 믿음 하나는 흔들림이 없다. 경영철학 1장이다. “획기적인 일을 했다는 사람이 물러간 뒤에 보면 그 회사는 나빠져 있다. 온갖 선언을 하고 포장을 했지만, 결국 다음 사람이 수습하느라 버거운 전투를 해야 한다. 꾸준히 준비하고 기본을 지키는 것이 성공의 조건이다.”
나는 회장을 많이는 모른다. 그저 잘나가는 회사와 그 리더의 모습에다 세상을 한번 겹쳐보고 싶었다.
정부는 어떤가. 경제를 걱정하면 악의적 의도가 있다고 의심한다. 기어이 격파하려 한다. 믿기지 않는 ‘완전 회복’을 말한다.
앞뒤 안 가리고 자주(自主)다. 국민 부담이 폭증하는 건 훗날 일이다.
갑자기 동북아 균형자를 자임하고, 정작 행동해야 할 때는 잠수한다. 균형자론이 평지풍파 일으킨다는 여론은 ‘친미’로 몰아붙인다. 그리고 중국을 향해 웃음 짓는다. 그 중국에서는 유미(留美·미국유학)파가 핵심 엘리트로 뜨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견은 설 자리가 좁다. 참여정부에 토론공화국이라지만 ‘생산적 소통’은 멀어졌다. 주로 대통령 말을 흉내 잘 내는 사람들만 모인다. 원로의 고언은 퇴물의 넋두리로 냉대받는다.
▼“나라님의 건강을 빌고 싶다”▼
말은 현란하고 장황하지만 시장에서 통하는 경제 실적, 외교 치적은 빈약하다. 이런 쓴소리를 하면 역공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요란한 구호에 대해선 공무원들조차 수군댄다.
회장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실용(實用)’이 정부에서 체질화되기를 기다리기엔 시간도 별로 없어 보인다. ‘실용=결과가 좋은 것’이다.
정부의 고객은 국민이다. “나라님이 건강하시기를 늘 기도한다”는 국민 고객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도록 정부가 회장을 많이 닮아 주었으면 좋겠다. 국민에게 이 정도 이기심은 허락하기 바란다. 세금 내기가 여간 힘겹지 않은 국민이다.
배인준 논설실장 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