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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김승련]미국판 편 가르기

입력 | 2005-04-25 19:02:00


요즘 미국 워싱턴 의회 소식을 다루는 신문기사의 제목에서 단연 눈에 띄는 어휘는 ‘DELAY’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제목을 읽을 때만큼은 철자를 잘 살펴야 한다.

이 단어에 대문자 L이 사용됐다면 그 기사는 톰 들레이(DeLay)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에 관한 기사다. 들레이 의원이 로비스트의 접대를 받았는지, 그래서 의회 윤리규정을 어겼는지를 다룬 기사라고 보면 맞다. 소문자 l이 들어 있는 Delay(딜레이·연기하다)가 눈에 띄면 이것은 존 볼턴 유엔대사 내정자에 대한 상원 외교위의 인준 표결이 연기됐다는 기사다.

두 사람은 자기 분야에서 ‘내 방식이 옳다’는 확신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유명한 강경파다. 영향력도 크다. ‘망치(hammer)’(들레이), ‘골목대장(bully)’(볼턴)이라는 별명이 두 사람의 개성을 잘 설명해 준다.

‘들레이 때리기’에는 워싱턴포스트가 가장 앞장섰다. 이 신문은 워싱턴 로비회사들이 의회에 제출한 자료를 샅샅이 뒤지며 3월 이후 4, 5건의 구체적인 윤리규정 위반 사례를 보도했다.

볼턴 내정자에 대한 ‘지상(紙上) 청문회’는 인격 검증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아랫사람을 거칠게 다룬다’는 시비까지 일고 있다.

수세에 몰린 두 사람은 언론과 민주당의 문제 제기를 음모론으로 맞받아치고 있다.

들레이 의원은 특유의 편 가르기에 나섰다. “리버럴 언론의 표적 보도다. 신문들이 입을 맞춘 듯 나만 공격한다. 기존의 편집 원칙도 무시되기 일쑤다.” 그는 은근히 음모론과 정쟁의 피해자라는 인상을 심으려 하고 있다.

볼턴 내정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후견인’으로 알려진 딕 체니 부통령이 대신 나서서 “국익이 달린 유엔대사 인준을 놓고 정치 공세가 도를 넘어섰다”며 민주당을 공격하고 있다.

미국 사회가 워낙 양분된 탓에 두 사람의 항변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미지수다. 언론도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정론지의 보도마저 정치적 편 가르기의 산물로 보는 분위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들레이 의원의 반박이 부담스러운 탓인지 1987∼89년 자사(自社)가 앞장서서 민주당 짐 라이트 하원의장의 낙마를 주도한 일까지 상기시켰다. 공화당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뉴욕타임스도 마찬가지 처지인 듯하다. 뉴욕타임스는 7일자에 “들레이 의원의 부인과 딸이 정치활동위원회(PAC)에서 ‘컨설팅 수당’ 형식으로 거액을 받았다”는 기사를 1면에 주요 기사로 실었다. 그러자 당장 “다른 정치인도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국제뉴스를 중시하는 뉴욕타임스가 이런 (국내 정치) 기사를 1면에 다룬 것은 ‘숨은 뜻’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역공을 받아야 했다.

두 사안은 하원 윤리위의 조사 결과와 상원 외교위의 인준 표결을 통해 승부가 가려지게 된다. 그러나 미국 사회도 점점 정쟁만 있고 시시비비는 없는 ‘심판자 상실’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