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대왕, 교활한 도적의 눈속임에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한왕 유방이 그토록 많은 군사를 빼냈다면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형양을 들이칠 때입니다. 전군을 들어 홍구(鴻溝)를 건넌 뒤 밤낮없이 형양으로 달려가면 며칠 안돼 유방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보다 못한 범증이 그렇게 패왕을 깨우쳐 주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패왕은 마치 적에게 겹겹이 에워싸인 진채 속에 갇힌 것처럼 움직임이 없다가 한신과 장이가 조나라에 이어 연나라까지 항복 받았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군사를 움직였다.
“이제 모두 조나라로 간다. 조나라에 한신과 장이의 대군을 두고 형양으로 갈 수는 없다. 조나라부터 평정한 뒤에 형양으로 가 유방을 사로잡도록 하자.”
패왕이 장졸들에게 그 같은 명을 내리자 이번에도 범증이 나서서 말렸다.
“그리 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한왕 유방이 바라는 일입니다. 한신과 장이가 조나라를 차지했다고는 하나, 팽월이나 관영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거느린 군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등에나 이가 짐승의 살갗에 붙어 그 피를 빨 수는 있어도 목숨을 노릴 수는 없듯이, 저들도 대왕을 귀찮게 할 수는 있으나 감히 대왕께 덤벼들만한 세력은 못됩니다. 대왕께서는 그들을 쫓아 대군을 지치게 만들기보다는 전군을 휘몰아 형양으로 치고 드시어 하루 빨리 유방을 목 베어야 합니다. 유방만 잡으면 한신이나 팽월의 무리는 바람 앞의 재처럼 자취 없이 흩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패왕 항우는 이번에도 범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장막 안에서 천하의 형세를 따지고 계책을 짜는 데는 아부(亞父)가 낫겠지만, 싸움터를 달리며 승패의 기미를 살펴 적을 무찌르는 데는 과인이 앞설 것이오. 이제 보니, 과인과 유방의 다툼은 한판으로 끝날 싸움이 아니라 여러 판의 싸움으로 어우러진 쟁패전이 되었소. 순서야 어떠하건 결국은 저들 모두를 쓸어버려야 비로소 천하는 과인의 것이 될 것이외다. 거기다가 한신과 장이는 조나라 연나라를 차지하여 우리 등 뒤를 노릴 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군사와 곡식을 거둬 형양의 유방에게 받치기까지 한다하니 더욱 그냥 둘 수 없소!”
그런 말로 제법 조리 있게 맞받으며 장졸을 몰아 동쪽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조나라를 쳐부순 한신이 새로운 성읍(城邑)을 손에 넣는 대로 그곳의 장정을 뽑아 형양으로 보낸다는 것까지 들은 듯했다.
패왕이 그렇게 우기고 나서니 범증도 더는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깊숙한 우려의 눈길로 패왕을 살피면서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와 같은 패왕의 결정도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날과 같은 집중과 속도를 유지하여 한신과 장이를 철저하게 들부수어 놓는 것도 훌륭한 전략일 수 있었다. 비록 한신과 장이가 조나라와 연나라를 평정하였다고는 하지만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데다 조참이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형양으로 돌아간 뒤라 패왕의 본진을 맞기에는 어림도 없는 세력이었다.
그런데 하수(河水)만 건너면 바로 조나라의 심장부로 접어들게 되는 복양(복陽)에 이르러 다시 패왕의 새로운 고질이 다시 증세를 드러냈다. 머뭇거림과 소심으로 나타나기 일쑤인, 어울리지 않는 신중함이 그랬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