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 평생을 재일교포로 살아온 나는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직후 발간된 낡은 잡지를 지금도 소중히 가지고 있다. ‘이번 협정으로 양 민족의 우호를 바랄 수는 없다고 본다.’ ‘불신감이란 나는 무조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는 데서 생긴다. 소통의 길을 열어 두려면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 당시 양국 지식인들이 이 잡지에 쓴 코멘트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이들은 한일협정의 기본 정신에 ‘역사 청산’이 반영되지 않았음을 우려했다.
협정 타결까지 14년을 끈 이유도 바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양국간 인식 차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침략행위에 대한 청산 요구를 철회하는 대신 경제협력 명목으로 자금을 얻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한일협정에서 ‘배상’이라는 단어가 회피되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여지를 남겼다. 한국은 일본의 자금을 지렛대로 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 냈다. 일본에도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 정부의 자세를 긍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조약 내용이 어떠했건, 일본은 침략행위를 자주적으로 반성하는 나라가 돼야만 세계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최근 일본에 배타적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항해 한국 정부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과의 연대를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야말로 자국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명확한 사죄와 보상을 자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자면 상당한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지금까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어떻게 취급해 왔는가. 성급히 용공진보세력이라 몰아붙이고 적대시하지는 않았던가. 역대 정권은 이들보다는 침략의 역사를 청산하지 않은 정치가들, 즉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후쿠다 야스오 씨 등과 손을 잡았다. 일본에서는 그들이 친한파를 자칭하고 있다. 망언의 주역인 이시하라 신타로 씨나 아베 신조 씨,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마치무라 노부타카 외상이 모두 친한파의 본가인 세이와카이(후쿠다파)에 속해 있다. 사실 일본의 양심파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김대중 씨다.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 이들과 연대해 새로운 한일관계를 향해 움직였다면 오늘날 상황은 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김 씨가 자신의 납치문제마저 불문에 부치자 일본의 양심파는 썰물 빠지듯 한국에 대한 관심을 버렸다.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발언에도 일본의 양심파는 위화감과 허탈함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이런 과정을 돌아보면 그들과의 연대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양국의 뒤틀린 관계를 바꾸는 데는 그들의 협력이 꼭 필요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재일교포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가치나 활용 가능성에 대해 무관심하지만 일본 국민에 대한 계몽활동에서 이들만큼 적합한 존재는 없다. 민단, 총련, 일본 국적 취득자를 합하면 무려 100여만 명이 일상적으로 일본 국민과 접촉하고 있다. 이들의 힘을 활용해 일본 양심세력들과 항구적 교류 기구를 실현해 낸다면 이는 일본의 우익들에게도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 될 것이다.
홍성곤 한국해양심층수㈜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