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시문학사를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정지용(鄭芝溶·1902∼1950)을 들 수 있다. 그는 1926년 ‘학조’에 ‘카페 프란스’와 같은 다다이즘 경향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해 1930년대 초반에는 ‘시문학’파에 참여하여 순수 서정시의 세계를 보여주었고 이후 종교시와 산수(山水)시라는 시적 편력을 거쳐 해방 정국에는 좌익 문단에서 활동하였다.
많은 시인들 가운데 하필 정지용의 시집을 추천하는 것은 그가 문학적 완성도를 갖추면서도 시기에 따라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쓰면서 한국시의 변화상과 우리 문단의 고뇌를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의 초기 시는 모더니즘 계열의 시였지만 이미지를 중시하는 순수 서정시를 보여줌으로써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순수 서정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섬세한 언어의 조탁(彫琢)과 감각적인 이미지는 후대문인들, 특히 1940, 50년대에 활동한 문인들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를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1920년대 후반 ‘조선지광’에 발표한 시에서부터 찾을 수 있으며 이 같은 특성을 잘 보여주는 시로는 그의 대표작인 ‘향수’나 ‘유리창 1’ 등이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 시는 ‘향수’의 첫 부분으로 감각적 이미지를 구사하여 인간의 원초적 마음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향에 대한 심상(心象)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지금은 훼손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930년대 중반엔 일제 파시즘의 가혹한 탄압 앞에서 그는 절대적인 신에 눈을 돌려서, 식민지 지식인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인 허기와 갈증을 신앙을 통하여 메우려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지용의 이와 같은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양의 고전과 산수의 풍경을 그리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즉 ‘바다’의 시편을 거쳐 ‘옥류동’ ‘비로봉’ ‘장수산’ ‘백록담’으로 시선(視線)을 옮기고 있다.
이후 새벽안개처럼 찾아온 광복은 이 땅의 지식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해방 정국을 맞아 정지용은 좌익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보여주었던 ‘자기 지키기’ 행위였던 우리말로의 글쓰기에 만족할 수 없었으며,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서 시를 쓰기보다는 나라를 만들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언론인으로서의 글쓰기와 학교 선생으로서의 가르치기를 선택하게 된다.
우리 근대 문인들의 글쓰기는 지식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삶 그 자체였다. 그리고 한국 문학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정지용의 시적 편력과 글쓰기 역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윤여탁 서울대 교수·국어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