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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충식 칼럼]일본의 ‘쓸개’, 한국의 ‘쥐뿔’

입력 | 2005-04-27 18:39:00


“미국과 일본은 150년 전통의 동맹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말이다. 1853년 페리의 흑선(黑船)이 함포를 들이대고 일본의 개국을 강요한 이래 줄곧 맹방으로 지내 왔다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하와이 기습폭격은 누가 했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은 누가 떨어뜨렸나?

무지(無知)나 건망증을 시비하자는 게 아니다. 실로 미일 관계는 60년 전에 수백만 명을 죽이는 전쟁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다. 특히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 부시 대통령은 그야말로 둘도 없는 ‘의형제’다. 그래서 실언을 웃어넘길 수만도 없다.

9·11테러 직후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에 간다. 그는 대통령을 만나자마자 “‘하이눈(high noon)’이라는 영화를 아십니까”라고 서부영화 얘기를 꺼내 텍사스 출신을 기쁘게 했다. 그리고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부시야말로 (하이눈의 스타인) 게리 쿠퍼다”라고 비행기 태웠다.

▼韓日 거꾸로 된 對美자세▼

일본의 친미는 ‘진국’ 친미다. 태평양전쟁 중의 철천지원수 ‘귀축미영(鬼畜米英)’은 양키군의 진주와 더불어 순식간에 ‘기브 미 초콜릿!’이 되고 만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기념관을 가 보면 대량살상에 대한 개념적 저주만 있지, 미국에 대한 증오는 없다.

일본에서는 총칼로 이긴 자가 바로 정의의 사도다. ‘의지할 바엔 힘센 데 붙어라’는 일본 속언도 그것과 통한다. 패전 후 일본은 모든 것을 미국과 진주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게 기댔다. 식량과 치안, 그리고 민주주의까지. 맥아더는 신(神)이었던 천황을 인간으로 내려앉히고 천황보다 센 지배자로 군림했다.

지금 일본인은 그 맥아더를 ‘일본을 만든 12인 중의 한 분’으로 꼽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낸 문필가 사카이야 다이치의 책에도 그렇게 나온다. 나흘 전 발표된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반세기 동안 일본 발전에 공헌한 사람’ 중에 맥아더가 10위다. ‘일본 정치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관료집단(38%) 미국(26%) 총리(23%) 순이다. 일본 속의 미국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이 조사에 나타난 ‘일본 발전의 공헌자’ 1위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다나카의 실각이 반미(反美) 때문에 미국의 공작을 받은 결과라고 믿는다.

일본에 반미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액세서리 수준이다. 사회당 공산당 같은 희망 없는 정당의 공염불일 뿐이다. 그래서 고이즈미는 비아냥댄다. “반미감정은 반(反)자민당 감정과 닮았다. 하는 짓은 틀린 게 없는데, 지지하고 싶지 않다는 심보 때문이다”고 약을 올린다.

마치무라 노부타카 외상은 늘 “미국이라는 동맹이 없이 일본은 성립할 수조차 없다”고 공언한다. 세계 최대의 군사대국, 88개국에 군인 16만 명을 주둔시키는 유사제국(類似帝國) 미국. 거기에 2등 경제 대국은 납죽 엎드려 기고 있다. 이치대로라면 유엔 분담금도 왕창 내는 일본이 미국에 뻣뻣하고, 주둔 미군도 많고 일본에 비하면 쥐뿔도 없는 한국이 굽실거려야 할 텐데, 현실은 반대다.

▼비굴도 만용도 국익 도움안돼▼

북한 핵 문제가 풀리기는커녕 꼬이기만 하고, 한국에서 반미·반일 감정이 터지는 게 따지고 보면 다 거기에 이어져 있다. 미국은 미국대로 ‘쥐뿔도 없으면서 기지 않는’ 한국이 성가실 뿐이다. 쓸개 빠진 일본이나, 쥐뿔도 없어 보이는 한국이나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일본은 미국에만 긴다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까지 거저먹을 수 있는 건 아님을 알게 됐다. 한국 역시 성깔만 믿고 얼굴 붉힌다고 미국과 국제사회가 우리 편이 될지 헤아려야 한다.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