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 두 줄로 스팽글(Spangle) 장식이 들어간 커다란 가방.
패션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 바네사 브루노”라고 할 것이다.
패션 리더들에게 ‘필수 아이템’이 된 스팽글 토트백으로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 바네사 브루노(39)가 한국 첫 단독 패션쇼를 위해 최근 내한했다.
10대에 모델로도 활동한 바 있는 그녀는 나이를 읽기 어려울 만큼 경쾌하고 늘씬했다.
스팽글 토트백으로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 바네사 브루노. 프릴이 달려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진보라색 톱과 캐주얼한 진을 입고 코가 둥근 웨지힐 슈즈를 신었다.
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일민미술관 내 카페 ‘이마’에서 그를 만나 패션 스타일을 들었다.》
○ 고전미 되살린 현대적 감성
사진 촬영을 위해 그녀가 골라 입은 옷은 고전적 느낌의 프릴이 달린 진보라색 톱과 캐주얼한 진, 그리고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보라색 재킷. 코가 둥글고 귀여운 느낌의 웨지힐 슈즈를 신었다.
“빅토리아 시대 풍의 프릴로 톱을 장식했죠. 오래된 빈티지 스타일이지만 여기에 진을 함께 입어 현대적인 감성을 결합시킵니다.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내지만 실제로 입은 사람은 옷이 헐렁해 편안해요. 고전에서 딴 모티브를 현대적 의미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이 제 디자인의 핵심이죠.”
브루노가 내놓은 이번 가을·겨울 시즌의 주제는 ‘나폴레옹과 조세핀.’ 퍼프 소매와 엠파이어 스타일의 하이 웨이스트라인 등 18세기 로코코 시대 살롱 분위기를 되살렸다.
브루노의 옷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도 개성이 강한 여성을 구현한다”는 평을 듣는다. “나에게는 페미니스트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10대 때 모델로 일하던 그녀가 디자이너로 나선 것은 모델 일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만든 옷을 입고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주체적인 일을 원했어요.”
그런 주체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을 꾸밈없이 드러내 주는 것이 그녀의 패션 철학이다.
그는 하도 오래 사용해서 조금은 낡은 스팽글 토트백을 들고 있었다.
“이 백은 평범한 쇼핑백을 보고 만들었어요. 크고 실용적인 쇼핑백 스타일로 색깔을 다양하게 하고, 여성적이고 트렌디 분위기를 주기 위해 스팽글 장식을 달았죠. 이렇게 유행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유행을 좀처럼 좇아가지 않는 파리지엔들이 브루노의 스팽글 백만큼은 ‘너도 나도’ 들고 다니는 이유를 물었다.
“맞아요. 프랑스인들은 좀처럼 남과 같은 것을 사지 않죠. 아마도 실용적이면서도 쉽게 사기 어려운 가격의 백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느꼈을 거예요.”
그렇다면 요즘 파리지엔의 패션 경향은 어떨까. “예전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프라다 아니면 루이비통 등 한 가지 브랜드 제품으로 갖춰 입는 ‘토털 룩’이 유행이었습니다. 요즘엔 가격과 스타일, 브랜드가 각각 다른 아이템을 취향에 맞게 매치해 걸칩니다. 거대한 유행이 있고 개인이 그것을 좇는 게 아니라 각각 자신만의 유행을 만들어 내는 거죠.”
○ 영감의 도시 파리
이탈리아인인 그녀의 아버지는 고급 브랜드 ‘까사렐’과 ‘엠마누엘 칸’을 경영한 패션 사업가이고, 덴마크인 어머니는 패션 모델 출신. 그녀는 파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가장 풍부하게 불어넣어 주는 곳도 이 도시라고 한다.
“파리의 거리, 파리의 사람들, 파리의 생활 모두가 영감을 주죠.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아마도 디자이너가 되지 못했을지도 몰라요.”
퍽 다른 곳이지만 서울, 특히 이날 다녀온 인사동도 그녀의 감성을 자극했다고 한다. “장소 자체가 주는 느낌이 좋아요. 편안하고, 부드러워요. 마치 전혀 다른 고대의 시간 속에 와 있는 것 같았죠.”
그녀는 인사동의 한 가게에서 샀다며 사진 엽서를 내밀었다. 1950, 60년대로 보이는 배경 속에서 허름한 한복 차림의 엄마가 환한 미소를 띤 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사진. “엄마의 표정을 보세요. 아이를 바라보면서 너무나 기쁘게 웃고 있잖아요.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젖을 물렸지만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 아니겠어요. 참 감동적이에요. 이런 것들이 모두 제 디자인에 영감을 줍니다.”
그녀에게도 아홉 살짜리 딸이 있다.
○ 행동하는 디자이너
그녀에게 장래 계획을 물었다. 그녀는 “환경운동과 아이들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다”며 탁자에 바짝 다가앉아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지금 너무 낭비하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면 너무 이기적인 거죠. 지금 근본적으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큰 재앙이 올 겁니다.”
그녀는 내년 봄·여름 시즌에는 환경 보전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티셔츠를 내놓을 계획이다. 좀 더 돈을 벌면 불우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 나서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패션(fashion)이 나의 패션(passion·열정)입니다.”
그녀의 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글=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사진=강병기 기자 arch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