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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눈/후지와라 기이치]일본이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입력 | 2005-04-28 18:20:00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제2차 세계대전을 무시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 일본의 많은 중학교가 후소샤(扶桑社)판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일본의 안과 밖에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2차 대전을 일본인(군인이 포함되지 않은 일반 시민)이 희생자가 된 전쟁으로 기억해 왔다.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고베 등 대도시가 공습을 받아 쑥대밭이 됐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는 도시 공습의 정점이었다.

전쟁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는 다짐은 전후 일본의 출발점이었다. 일본의 전력(戰力)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는 일본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전후의 일본은 군비 확충에 나서 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병력을 갖게 됐다. 그러나 이는 일본을 군사 거점으로 활용하려는 냉전시대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일본 내 여론은 오히려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전후 일본에서는 평화주의가 여론의 지지를 받는 국가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평화주의는 어디까지나 일본 국민의 희생에 초점을 맞춰 형성된 것이다. 한국,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희생자는 논외였다. 원폭 피해를 본 히로시마에서도 일본인 희생자에 대한 추도 행사가 중심이다. 한국인 피폭자 추도가 이뤄지는 데는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아시아 국가들은 2차 대전을 일본군에 의한 침략이자 전쟁, 아시아인에 대한 살상으로 본다. 그래서 아시아의 희생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는 일본의 ‘평화주의’를 평화주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본의 지배가 초래한 희생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은 전쟁을 잊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이 자행한 살상을 떠올리는 중국 및 싱가포르의 전쟁 기억과 일본인 희생을 애도하는 일본의 전쟁 기억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일반 시민만이 아니라 당시 숨진 군인에 대해서도 추도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에 내몰린 만큼 병사들에게는 살인자라는 측면과 함께 전쟁의 희생자라는 측면도 있다. ‘왜 무기를 갖지 않은 일반 시민만 추도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병사들에게도 추도가 이뤄져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일본의 일반 시민만이 전쟁의 희생자라는 일본식 평화주의는 이처럼 ‘왜 일본군에 의해 숨진 희생자를 외면하느냐’는 일본 바깥의 비판과 ‘왜 일본군 병사를 외면하느냐’는 일본 내부의 비판 사이에 끼여 부대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일본에 사는 사람들은 2차 대전 때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다. 따라서 현재의 일본인을 향해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2차 대전 당시의 일본과 달리 패전 후의 일본은 전쟁을 일으켜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다. 일본이 전쟁을 피한 것은 결코 미국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일본 국민의 선택에 따른 결과다.

그렇더라도 일본이 자국 국민의 희생에만 주목해 전쟁을 기억하는 한 일본에 대한 인접국들의 불신은 없어지지 않는다.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일반 병사만이 아니라 전쟁 지도자까지 기리는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계속하는 한 일본과 아시아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