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e메일, 전화 등 사람들에게 소식을 빨리 전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하지만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가 갖는 따뜻한 인간미와 낭만에는 미치지 못한다. 특히 군인들에게 위문편지 한 통은 고된 시간을 잊게 해 주는 시원한 ‘청량제’ 역할을 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컴퓨터 전원을 켜고 키보드 몇 번 누른 후 클릭하면 상대방에게 바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요즘 세상. 그래도 가끔은 볼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정성 가득한 편지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다.
1983년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같은 반 한 여자아이를 좋아했다. 새벽이슬을 머금고 사는 듯한 청순함과 양 갈래 머리스타일로 귀엽기까지 한 그 아이와 결혼하고 싶었다. 호시탐탐 고백의 기회를 노리던 차에 어느 날 나는 그 아이의 집에 놀러갔다. ‘오늘이 기회다’라고 생각했던 나는 문득 그 아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난 네가 너무 좋아. 우리 결혼하자.’
그 아이의 방에서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남기고 나는 마루로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0분 후 그 아이가 답장을 가지고 마루로 나왔다. 내 손에 쥐어준 그 아이의 편지 내용은 놀라웠다.
‘나도 좋아.’
사랑이 뭔지, 여자가 뭔지 알지 못했지만 순수한 편지 한 통으로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말 한 마디로 ‘너 좋아해’라고 고백할 수 있었지만 편지가 주는 애틋함은 결코 말로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편지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은 군대 시절 위문편지.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우표가 붙어 있는 편지봉투를 뜯을 때의 설렘을 기억할 것이다. 부모님의 편지 외에도 윤석을 비롯한 동료 선후배 친구들의 편지, 홈페이지에 올려진 주소를 보고 보내준 이름 모를 분들의 편지. 저녁의 짧은 자유시간에 그날 도착한 편지들을 읽고 있으면 하루의 고통은 다 잊을 수 있다.
훈련소에서 받은 편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다름 아닌 개그맨 동기이자 인생 선배인 표영호가 보내준 편지. 그의 글을 전부 공개한다.
‘Dear 경석. 군대, 재미있게 생각하고 열심히 해라. ―영호 兄.’
영호 형은 방위로 군 생활을 했다. 그것도 이발병. 편지지는 총 두 장이었는데, 한 장은 그냥 두꺼워 보이라고 넣은 백지였다. 훈련소에서 내가 받은 편지 중 가장 짧았지만 가장 많이 웃을 수 있는 편지였다. 역시 영호 형다운 편지였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총 석 장짜리. 역시 내용 전부를 공개한다.
‘Dear 영호 兄. 네. ―경석.’
영호 형 편지보다 더 두껍게 백지를 두 장이나 넣었다.
아무리 편한 것이 대우받는 세상이지만 옛것의 낭만과 깊이를 대신해 주지 못하는 것 같다. 제대한 지도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새로 시작한 ‘생방송 TV 연예’도 반응이 좋고, 조만간 또 새로운 프로그램에 투입될 것 같다. 제대 후 방송 적응을 잘 못할까봐 하루가 멀다 하고 절에 기도 다니시는 엄마, 프로그램 하나하나 기사 한 줄 한 줄까지 모니터해 주시는 아버지께 오늘은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 한 통 보내드려야겠다.
○ 서경석은?
△1971년 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방송전공 석사 △1993년 MBC 개그 콘테스트 금상 수상 이후 연예계 데뷔 △MBC ‘테마게임’ ‘오늘은 좋은날’ ‘칭찬합시다’ 등 출연. 현재 SBS ‘패밀리 스토리 우리 집에 생긴 일’ ‘생방송 TV연예’, MBC ‘타임머신’의 MC를 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