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은 이타(利他)나 대의(大義) 혹은 공존공영을 ‘위해서’ 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어떤 행위를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라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윤리 도덕은 우리 모두에게 혹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로움이나 유용함은 한갓 감성적인 욕구 충족에 대응하는 것이다.
감성적 욕구 충족에 상응하는 명령은, 모든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이 그러하듯이, 능란한 처세의 요령은 될지 모르나 보편적 도덕 법칙이 되지는 못한다.
도덕은 처세의 기술이 아니라 인격의 표현이다. 선은 감성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이 ‘선’의 관념으로부터 비로소 ‘좋음’ ‘가치’ 등의 개념이 유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법칙은 정언적, 즉 단정적 명령으로 이성적 존재자에게 다가온다. 가언적인 즉, 어떤 전제 하에서 말해지는 명령은 필연성이 없다. 명령을 받은 자가 그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명령은 명령으로서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웃에 도움을 청하게 될 때를 생각해서 항상 이웃에 친절하라” 따위의 가언적 처세훈들은 도덕적 선의 표현이 될 수 없다.
선은 인격적 주체의 가치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이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또한 사람으로서 사람은 인격적 주체이고, 주체란 문자 그대로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될 수 없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인격적 행위만이 도덕적 즉 당위적이므로 그것은 인간이 도달해야만 할 이성의 필연적 요구이다.
어떤 사람이 행위를 할 때 ‘마음 내키는 바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를 우리는 성인(聖人)이라 부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행위의지가 (정언적인) 도덕법칙과 완전하게 일치함은 신성성(神聖性)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감성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이런 신성성에 ‘현실적으로’ 도달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완전한 일치를 향한 무한한 전진’ 가운데에서 우리는 인격성을 본다.
이 같은 가르침을 담은 ‘실천이성비판’(1788)은 ‘순수이성비판’(1781), ‘판단력비판’(1790)과 더불어 이마누엘 칸트(1724∼1804)의 이른바 3대 비판서 가운데 하나다.
이 ‘실천이성비판’은 또한 3부작으로 볼 수 있는 칸트의 도덕철학 3대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출판 순서에서나 내용 면에서 그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윤리형이상학 정초’(1785)가 칸트 도덕철학의 포괄적 서설이라면 ‘실천이성비판’은 그 체계의 골간이고 ‘윤리형이상학’(1797)은 이에서 구축된 원리로부터 실천 세칙을 연역해 놓은, 이를테면 응용 윤리학이다.
이를 한 벌로 읽고 공부한다면 고전의 ‘참맛’을 느낌과 더불어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깨치게 될 것이다.
백종현 서울대 교수·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