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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마당/전성철]절차를 중시하는 금융정책 아쉽다

입력 | 2005-05-03 18:06:00

외국계 펀드와 투자기관에 대한 세무조사는 그 당위성은 인정되나 전격적인 방식으로 인해 당사자들을 당혹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스타타워 빌딩 내에 위치한 외국계 펀드 론스타 사무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국내총생산(GDP)이 마냥 올라간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쿠웨이트를 선진국이라 하지는 않는다. 선진국의 가장 중요한 특질은 ‘과정’, 즉 ‘절차’를 중시하는 문화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의도가 좋고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절차가 공정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 그 전체가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선진국식 관념이다.

요즘 외국인투자가에 대한 정부의 일련의 조치가 논란이 되고 있다. ‘5% 룰’의 실시와 외국 펀드에 대한 세무조사 등이 대표적이다. 당국은 이것들은 모두 선진국에 있는 제도이고 따라서 우리가 실천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목적과 동기를 보면 그렇다.

그렇다면 왜 외국인투자가들이 이 제도에 대해 소란을 떠는가. 그들의 초점이 목적과 동기보다는 절차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5% 룰에 대해 충분한 고지를 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다. 정부는 석 달 전에 입법고시를 하고 편지를 몇천 통 보냈다고 하지만 외국인들의 관습으로는 충분치 않다.

선진국에서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여유 있게 한다. 따라서 일이 진행되는 속도도 느리다. 점심 약속 하나도 몇 주 전에 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같이 며칠 전에 약속해 뚝딱 해치우는 것은 극히 예외인 경우다. 자연히 이처럼 중요한 규칙의 변화는 6개월, 1년 이상의 충분한 시간을 두고 당사자들이 대비하도록 한다.

많은 외국인들은 우리 정부의 5% 룰에 대해 충분한 사전고지를 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다. 며칠 만에 후다닥 이뤄졌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비명과 비난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세무조사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에서도 범죄 혐의가 짙고 증거 인멸 가능성이 높으면 불시에 들이닥쳐 자료를 압수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대부분 자발적인 자료 제출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할 때는 점차 강경한 조치를 취한다. 정부의 어떠한 조치나 행동에도 피조사자가 변호사와 충분히 상의해 권익을 보호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번에 세무조사 대상이 된 사람들은 범죄자가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적도,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을 만한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알고 있다. 이들은 자국에서 관계당국으로부터 존중을 받으며 조사받는 데 익숙해 있다. 한국에서 사업하는 거의 모든 다국적 기업 또는 펀드들이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갑자기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한국식’으로 서류와 장부를 압수해 갔으니 이들이 놀라고 당황해 하는 것이다. 무슨 마약사범이나 파렴치범 같은 대접을 받았으니 말이다.

한국은 소위 ‘금융 허브’가 되겠다고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 세계 금융인들이 한국에서 보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절차적 정의’를 지키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만 그 결과에 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시각이다. 세무조사를 하지 말라는 것도, 5% 룰을 세우지 말라는 주장도 아니다. 주권 국가로서 얼마든지 당당하게 제도를 세우고 시행할 수 있다. 다만 좀 더 세련되게 하자는 것이다.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