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래는 바퀴의 홈에 줄을 걸어 작은 힘을 큰 힘으로 바꾸거나 힘의 방향을 바꾸는 장치다. 4일 개봉된 영화 ‘혈의 누’는 작은 실마리를 끌어당기니 큰 사건이 드러나는 도르래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사건을 파헤치는 군관 이원규(차승원)의 힘은 너무 미약해 자신의 ‘도르래’로 끌어올린 엄청난 실상을 감당해 낼 수 없어 줄을 놓는다. ‘혈의 누’는 그 순간 추리 스릴러에서 인간의 염치(廉恥·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에 대한 깊은 성찰의 드라마로 변한다.
1808년 어느 날 ‘제지업이 번성해 관내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속하는’ 섬 동화도에서 조정에 공물로 바칠 종이를 잔뜩 실은 배에 불이 난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조정은 차사(差使·최종원)와 이원규를 섬에 파견한다. 이들이 섬에 온 날 가슴이 나무창에 꿰어 매달린 시신이 발견된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음 날 호방(정규수)은 제지소의 종이 끓이는 솥에서 삶겨 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제지소 직공 독기(유해진)는 물 먹인 한지가 얼굴에 덮여 질식사한다. 섬사람들은 7년 전 억울하게 죽은 당시 제지소 주인 강 객주(천호진)의 원혼이 복수하러 왔다며 공포에 휩싸인다. 이원규는 죽은 이들이 무고한 강 객주를 고발한 사람들이었음을 알아낸다. 5명의 발고자 중 마지막 인물을 쫓던 이원규는 종3품 도총관을 지낸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거대한 진실과 만난다.
스릴러는 영화 ‘장미의 이름’이나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단서를 하나하나 추적해 나가면서 범인을 알아내는 과정과 범행의 이유 혹은 반전이 드러나는 결론이 조화를 이룰 때 쾌감을 준다. 그러나 ‘혈의 누’에서는 범인이 이원규의 대사 속에서 밝혀진다. 스릴러적인 긴장을 떨어뜨리면서까지 감독이 이런 설정을 고집한 이유는 ‘혈의 누’라는 도르래가 최종적으로 끌어올리려 한 것이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탐욕과 부끄러움이라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화도는 도르래가 달리지 않은, 그래서 누구라도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거대한 ‘우물’과 같다. 강 객주에게서 빌린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의 억울한 죽음을 묵인한 섬 백성들이나, 제지소에서 나오는 풍부한 자본으로 섬사람들의 신망을 산 강 객주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교적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노여워하는 양반 김치성(오현경)은 ‘진실’이 우물 밖으로 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우물에 도르래를 매달고 진실을 퍼 올리려던 이원규는 오히려 음험한 과거를 지닌 자신의 아버지라는 또 다른 우물에 빠져 허우적댄다. 결국 동화도라는 우물이 피로 가득 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인지도 모른다.
주인공 원규(차승원)는 연쇄 살인사건을 수사하며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가족사와 부닥친다. 영화 ‘혈의 누’는 인간의 탐욕과 염치에 관해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사진 제공 좋은영화
영화에서는 도르래가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자본축적의 상징인 제지소 내부의 기물들은 육중한 도르래들을 통해 복잡하게 움직이고, 배에 불을 지르는 것도 조그만 도르래를 쓴 간단한 기계장치다. 이런 대목에서 도르래는 동화도라는 19세기 조선 마을에 밀어닥친 ‘근대성’의 기호로 읽힌다. 원혼의 저주를 막겠다고 닭의 피를 집에 칠하며 무당에게 의존하는 동화도 사람과, 시신의 시반(屍斑)과 사후 경직도로 사망시간을 추정하는 이원규의 대비는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대결로도 보인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피비(血雨)가 내리고 집단 광기에 빠지는 섬사람들을 보며 망연자실하는 이원규를 보면, 굳이 ‘근대냐, 봉건이냐’ 하는 이분법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혈의 누’는 시대배경에 큰 의미를 두는 영화가 아닌 것이다.
‘혈의 누’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면 하나하나에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스크린 저 모서리에 서 있는 선원의 얼굴조차 팽팽히 긴장해 있다. 숨이 막힐 지경이다. 임권택 감독 밑에서 10여 년 동안 배운 김대승 감독의 솜씨다. 차승원의 연기는 합격점을 줄 만하다. 그러나 박용우 최종원 오현경 유해진 박철민 등 조연급의 연기도 ‘주연을 잡아먹을 듯’ 강렬하다. ‘직금도(織錦圖·비단에 수를 놓아 편지 대신 보내는 것. 읽는 순서와 방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심허로(心虛勞·공황장애)’ 등을 알게 되는 재미도 쏠쏠하다. 18세 이상 관람 가.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