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성은 이미 사흘 전에 초나라 군사들 손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용저와 항성이 남긴 군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 말에 경포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과인이 남긴 관원과 장졸들은 무얼 하고 있었다느냐?”
“태재(太宰)를 비롯한 관원들이 장졸들과 더불어 백성들을 이끌고 성을 지켜보려 했으나, 어리석은 백성들이 따라주지 않아 그리됐다는 소문입니다. 용저와 항성이 성이 떨어지는 날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산 채로 땅에 묻는다고 얼러대자, 겁을 먹은 백성들이 성문을 열고 달아나려다 초군에게 틈을 보인 것입니다. 다행히도 대왕의 가솔들은 성이 떨어지기 전에 태재가 보호하여 육현(六縣)으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자 경포는 성난 가운데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불길이 이는 눈길로 성루를 올려보다가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든 장졸들은 들어라. 성안의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채비가 되는대로 성을 들이칠 것이니 지금부터 모두 흩어져 성벽을 기어오르는데 쓸 사다리와 장대, 밧줄과 갈고리를 모아들이도록 하라. 저물기 전에 도성을 되찾아 오늘밤은 성안에서 편히 쉬자!”
이에 구강군 장졸들은 급히 공성(攻城)을 준비해 한때 저희 도읍이었던 구강성을 들이쳤다. 하지만 구강은 홍구(鴻溝)와 회수(淮水)를 천연의 해자처럼 두른 데다 성벽이 높고 든든하기로 이름난 성이었다. 거기다가 지키는 초군(楚軍)도 머릿수는 많지 않지만 이미 채비를 하고 기다리던 터라 싸움은 경포의 뜻과 같지 못했다. 저물 때가지 두어 차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튿날 경포는 날이 새기 무섭게 다시 구강성을 들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번째 공격이 허사가 되어 잠시 쉬게 하고 있을 때, 동쪽으로 나가있던 탐마(探馬)가 달려와 급한 소식을 전했다.
“용저와 항성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느냐?”
경포가 푸른 글자가 새겨진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살피고 돌아온 군사가 공연히 죄지은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20리 밖에 진채를 내렸습니다. 곧 적의 척후(斥候)가 이곳에 이를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뱃심 좋은 경포도 다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많건 적건 성안에 아직 버티는 적이 있는데, 용저와 항성의 대군이 등 뒤로 다가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못되면 또다시 앞뒤로 적을 받아 낭패를 볼 수가 있었다.
“군사를 거두어라. 아무래도 아니 되겠다. 우선 육현으로 가자. 거기서 군사를 정비한 뒤에 다시 초군과 결판을 내자!”
잠시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며 생각에 잠겼던 경포가 그렇게 명을 내렸다. 이에 구강 장졸들은 성을 치는 데 쓰던 물품과 기구들을 모두 던져두고 육현으로 물러날 채비를 했다. 비록 싸움에 져서 쫓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며칠 전에 크게 당한 적이 있는 적군이 다가들고 있다는 소문에 장졸들의 마음은 쫓기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어지럽고 수선스러웠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