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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기타]‘컬러 여행’…서양명화 속 안료의 비밀을 찾아

입력 | 2005-05-06 18:11:00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의 매장’. 주황색 물감의 변질 되는 바람에 왼쪽 성 요한의 가슴이 봉긋 솟아오른 듯이 보인다. 오른쪽 빈칸은 성모 마리아를 그리기 위해 남겨놓은 부분. 귀한 ‘울트라 마린’ 물감을 구하지 못해 미완성으로 남았다. 사진 제공 아트북스


◇컬러 여행/빅토리아 핀레이 지음·이지선 옮김/592쪽·1만6500원·아트북스

미켈란젤로가 그린 16세기 그림 ‘그리스도의 매장’을 보면 몇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주황색 옷을 입고 있는 성 요한의 가슴이 봉긋 솟아 마치 여성의 유두처럼 보인다. 막달라 마리아의 갈색 옷은 유독 칙칙해 보인다.

가장 이상한 점은 그림 오른쪽의 빈칸이다. 사람의 형상처럼 보이는 빈 공간이 색칠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이상한 그림이 남아 있을까.

비밀은 ‘안료’에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요한의 옷을 칠한 자줏빛 버밀리언 물감이 변색돼 유두처럼 보이는 독특한 음영을 남겼다. 막달라 마리아의 옷은 값싼 푸른 물감 ‘아주라이트’로 칠했는데 이 물감은 안정성이 떨어져 쉽게 어두운 색깔로 변했다.

그림 오른쪽의 빈칸은 성모 마리아를 위해 남겨진 자리였다. 화가는 성모를 푸른색 옷으로 칠하고 싶었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처럼 값싼 물감을 쓸 수는 없었다. 색상이 아름답고 오래가는 ‘울트라 마린’ 물감을 주문한 뒤 마무리를 유보했으나 아프가니스탄이 원산지인 ‘울트라 마린’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1856년 영국의 퍼킨이 자주색 ‘모브’ 물감을 합성할 때까지 인류는 이처럼 불안정한 동식물과 광물에 의존해 색채를 표현했다. 그러나 평범한 재료만으로는 신비한 색채를 불러올 수 없었다.

아메리카의 발견과 함께 유럽에 전해진 ‘코치닐 카민’은 16세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스페인인들은 이 신비한 자줏빛의 정체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그 원료는 선인장에 기생하는 벌레의 체액이었다. 인도의 오지에서 찾은 ‘인디언 옐로’는 망고나무 잎을 먹인 소의 오줌을 가열해 얻었다. 바다달팽이의 눈물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자줏빛은 오늘날에도 멕시코에서 옷을 염색하는 데 즐겨 쓰인다.

18세기에는 미라의 늑골을 가루로 만들어 갈색 안료를 얻었다. 이 물감은 음영을 주어 입체감을 표현하는 데 적당했다. 19세기 프랑스의 한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 ‘사람의 몸’이 섞였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경건한 의식과 함께 그림을 자기 정원에 장사 지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른 뒤 물감들은 자신을 사용한 화가들을 배신하기도 했다. 고흐의 ‘장미’(1890년)는 원래 분홍색 장미로 그려졌지만 물감이 퇴색하면서 ‘흰 장미’로 불리게 됐다. 레이놀즈의 ‘아기를 안은 여인’(1782년)은 부드럽게 퍼지는 안료의 효과 때문에 한때 인상주의의 선구를 이루는 그림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실은 물감이 화학적으로 손상돼 번지는 바람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의 미술기자를 지낸 저자는 어린 시절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처음 본 뒤 다양한 색상과 물감의 매력에 빠졌다. ‘울트라 마린’의 신비한 색을 찾기 위해 여성의 신분으로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고, ‘인디언 옐로’의 제조 비법을 확인하기 위해 오지를 찾는 등 몸을 아끼지 않는 오랜 탐사 끝에 이 ‘색채와 안료의 잡학사전’을 완성했다.

원제는 ‘Travels through the Paintbox’(2002년).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