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구강을 떠난 경포의 군사들이 육현(六縣)으로 달려가기를 반나절이나 하였을까, 앞서 살피러갔던 군사들이 돌아와 또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초나라 대군이 육현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관도(官途) 가의 산과 들이 온통 초나라 깃발로 뒤덮여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용저와 항성이 우리를 뒤쫓고 있는데 무슨 놈의 초나라 대군이 또 앞길을 막는단 말이냐?”
경포가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가까이 숨어들어가 적진을 살피고 돌아온 군사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대장기에 쓰인 이름은 항백이라 하였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항백까지 대군을 이끌고 왔다면 팽성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다. 항백이 조카 항성을 보낸 것은 그렇게 팽성을 비워두지 않기 위함인데, 그가 어떻게 하여 또 여기로 왔단 말이냐?”
경포가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되묻는데 항백을 잘 아는 장수 하나가 조심스레 그 말을 받았다.
“대왕, 항백이라면 넉넉히 그리할 수 있는 위인입니다. 아마도 패왕에게서 어떻게든 구강을 뿌리 뽑으라는 엄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경포는 항백의 대군이 이른 것을 믿지 않았다.
“아니다. 이는 과인을 속이려고 용저나 항성이 잔꾀를 부린 것이다. 많지 않은 의병(疑兵)을 풀어 깃발과 진채로 허장성세(虛張聲勢)를 하고 과인의 눈을 어지럽히려 하고 있을 뿐이다. 한 싸움으로 짓뭉개버리자!”
오히려 그렇게 소리치며 군사를 몰아 부딪쳐갔다. 하지만 들판과 산기슭에 기대 펼친 항백의 진채는 뜻밖으로 단단했다. 날카롭게 깎아 세운 녹각(鹿角)과 굵은 통나무로 촘촘히 세운 목책(木柵)은 어지간한 성벽에 못지않았다. 거기다가 그 뒤에 숨어있는 초나라 군사들도 경포의 짐작보다는 훨씬 대군이었다.
경포는 무서운 기세로 장졸들을 몰아댔으나 이번에도 싸움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구강으로 가는 도중에 용저와 항성의 협격을 받아 군사가 반나마 상한데다, 구강성에서도 하루 밤낮을 소득 없는 싸움으로 지친 경포의 군사들이었다. 그나마 용저와 항성에게 쫓기는 기분으로 달려온 터라 사기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두 번이나 몸소 앞장서 돌진했으나 적의 진채를 뚫지 못하자 경포가 주춤해 있는데, 다시 뒤쪽에서 다급한 전갈이 왔다.
“용저와 항성의 군사들이 벌써 십리 밖에 이르렀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등 뒤를 후려칠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경포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용저와 항성, 항백은 속도와 집중이 잘 배합된 패왕 특유의 전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임을 드디어 알아차린 것이었다.
“안되겠다. 북쪽으로 물러나라. 항백과 용저에게 앞뒤로 에워싸이면 그때는 정말로 빠져나갈 길이 없다. 육현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 다음에 찾아보자.”
마침내 육현으로 돌아가기를 단념한 경포가 그렇게 영을 내리고 군사를 북쪽으로 물렸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