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그때 패왕 항우는 아직도 하읍(下邑)에 머물러 있었다. 한편으로는 형양에 틀어박힌 유방을 한 싸움으로 사로잡을 수 있게 힘을 끌어 모으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저와 항백이 경포를 이겨 팽성의 등 뒤를 깨끗이 쓸어주기를 기다렸다. 범증이 애써 달래고 권한 대로였다.
그런데 동짓달이 채 가기도 전에 남쪽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용저 장군과 항성 장군이 구강성을 떨어뜨리고 경포를 회수 북쪽으로 내쫓았습니다. 또 항백 장군은 육현(六縣)을 에워싸고 있는데, 성안에는 경포의 처자가 들어있다 합니다.”
사자가 달려와 그같이 알리자 곁에 있던 범증이 조용히 물었다.
“경포는 어디로 갔느냐?”
“용저 항성 두 장군에게 태반이 꺾인 군사를 거느리고 회수를 건넜으나, 회수 북쪽에서 용저 장군에게 또 한 차례 호된 공격을 받자 갑자기 군사를 흩고 사라졌습니다.”
“군사를 흩고 사라지다니?”
이번에는 항우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모두 산이나 못가에 숨어 자신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려 달라며 남은 군사를 흩어버리고 겨우 몇 십 기(騎)만 거느린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한왕 유방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범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덧붙였다. 패왕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유방을 찾아갔다면 무엇 때문에 군사를 흩어버렸겠소? 조금이라도 군사가 많아야 유방에게 더 좋은 대접을 받지 않겠소?”
“아마도 경포가 용저와 항성에게 단단히 혼이 난 듯합니다. 사방으로 쫓기다가 회수 북쪽에서도 다시 타격을 받자 대왕께서 형양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계신 것으로 지레짐작한 것일 테지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는 뚫고 나갈 수 없다고 보아, 몸을 가볍게 하고 샛길로 유방에게로 달아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1000리 밖에 앉아있으면서도 바로 곁에서 본 듯 범증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패왕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군사를 풀어 형양으로 가는 샛길을 막고, 그 얼굴 시퍼런 도적놈을 사로잡아야 하지 않소?”
“이미 늦었거니와 구태여 그럴 까닭도 없습니다. 경포보다는 형양에 똬리를 틀고 앉은 묵은 구렁이를 잡아낼 일이 시급합니다. 이제부터 대왕께서는 또 한번 거록(鉅鹿)의 싸움을 치른다는 심경으로 힘과 물자를 모두 형양에 집중하신 뒤에 적이 숨 돌릴 틈 없이 매섭게 들이치셔야 합니다. 한신이나 팽월, 장이의 무리가 구원을 오기 전에 형양성을 우려 빼고 유방을 목 베어야만 천하가 대왕의 다스림 아래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자 패왕도 더는 딴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날로 군사를 휘몰아 형양으로 달려가며 용저와 항성도 지체 없이 뒤따라오도록 했다. 하지만 다 삭이지 못한 격렬한 미움만은 끝내 감추지 못했다.
“항백은 남아 반드시 육현을 떨어뜨리고 경포의 처자를 모조리 잡아 죽여 버려라! 구강의 군사들도 모두 거두어 경포가 돌아온다 해도 의지할 데가 없게 하라.”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