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자존심’으로 불렸던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차가 경영 위기에 빠지자 일본 도요타자동차 수뇌부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경쟁 업체의 부진을 틈타 한몫 잡으려는 속셈은 일단 아닌 것 같다. “힘닿는 데까지 GM과 포드를 돕고 싶다”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다.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 회장은 지난달 25일 기자회견에서 “자동차는 미국을 상징하는 산업이므로 일본 업계로서도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며 GM에 대한 지원 의사를 밝혔다. GM 차가 많이 팔릴 수만 있다면 도요타 차의 가격을 올려 GM 제품의 시장경쟁력을 높여 주는 방안도 강구하겠다고 덧붙였다.
듣기에 따라선 GM의 고전이 일본차의 저가 공세 탓으로 해석될 수 있는 민감한 발언이었다. 닛산 혼다 등 다른 업체들이 반발하자 도요타 측은 즉각 가격 인상 가능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도요타의 ‘내 탓이오’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 조 후지오 사장은 도요타가 자랑하는 하이브리드 및 연료전지 차량 기술을 GM에 제공할 뜻을 내비쳤다. 조 사장은 이달 중순 릭 왜고너 GM 회장과의 회동에서 미래형 차량의 기술 제휴와 공동 개발을 제의할 예정이다.
혼다와 닛산도 GM과 포드를 달래는 데에 열심이다. 혼다는 GM에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용 엔진을 제공했고 닛산은 포드에 무단변속기를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적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비즈니스계의 경쟁 논리는 적어도 현재의 미일 자동차 업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모습이다.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일본 자동차업계가 왜 몸을 낮추는 것일까. 일제 차의 대미(對美) 수출 급증으로 무역마찰을 초래한 1980년대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일본 정부가 2003년 말 광우병 파동 이후 수입을 금지한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재개를 서두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한 대미 추종”이라고 비판하지만 일본 정부는 미국 의회의 통상 압력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GM과 도요타는 세계 자동차업계 1위를 놓고 다투는 라이벌이다. 도요타는 지난해 752만 대를 팔아 포드를 제치고 2위에 오른 데 이어 2007년엔 GM까지 따돌리고 세계 정상에 오른다는 목표를 정한 바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GM의 재기를 돕겠다고 나선 오쿠다 회장의 속내에 새삼 눈길이 쏠린다. 확실한 것은 GM을 돕기는 돕겠지만 그 도움이 도요타의 정상 등극에 지장을 주는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도요타 경영진의 심각한 표정과는 상관없이 GM의 회사채가 ‘정크본드(투자부적격채권)’ 판정을 받은 직후 도요타의 주가는 3% 이상 올랐다.
강자 앞에선 비굴하다 싶을 만큼 몸을 낮추는 데 익숙한 일본 기업 특유의 처세술로 치부하기엔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도요타의 ‘굴신(屈身)’은 기업이든 국가든 자존심만 내세워 목청을 높이면 당장은 속이 후련할지 몰라도 결국 ‘남는 건 없다’는 진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박원재 도쿄 특파원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