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구강왕 경포가 한왕의 사자로 온 수하와 더불어 샛길로 형양에 이른 것은 한(漢) 3년 12월로 접어든 뒤였다. 경포는 도중에 패왕 항우의 대군에게 포착되는 게 두려워 얼마 남지 않은 군사마저 흩어버리고 겨우 몇 십 기(騎)만 호위로 남겼다. 그리고 밤을 틈타 천리 길을 더듬어 온 뒤끝이다 보니, 형양에 이른 경포 일행은 아래 위 가릴 것 없이 몰골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경포가 왔다는 말을 듣자 한왕 유방은 곧 그를 행궁(行宮)으로 들게 했다. 경포가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유방이 있는 방으로 불려갔을 때 유방은 마침 평상에 걸터앉아 여자들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다. 평소 즐겨 해오던 대로였다.
“어서 오시오. 구강왕.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시겠소.”
한왕은 여전히 여자들에게 두 발을 맡긴 채 경포를 내려다보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때 벌써 경포는 화가 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신(臣) 경포가 대왕을 뵙습니다. 진작 찾아뵙고자 하였으나 항왕의 흉맹한 눈길이 노려보고 있어 뜻과 같지 못했습니다. 이제 부르심을 받고서야 이렇게 대왕을 뵙게 되니 신의 허물이 적지 않습니다.”
도둑 떼의 우두머리로 늙어 오면서 기른 조심성과 노회함으로 입은 그렇게 웅얼거려도 속은 터질 듯 부글거렸다.
(나와 저는 다 같은 제후로서 저마다 한 땅을 다스리는 왕이다. 거기다가 나는 저를 찾아오기 위해 나라와 군사를 잃고 처자까지 외로운 성안에 버려두었는데, 이 무슨 무례냐? 같은 제후는커녕 중신의 대접도 아니 해주는구나. 아무래도 내가 잘못 온 것 같다. 너무 가볍게 주인을 바꾸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후회에 이어 비통함까지 일며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이라도 찌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한왕은 그런 자리를 길게 끌어 더 참을 수 없을 만큼 경포의 분노를 돋우지는 않았다. 곧 발을 닦게 한 뒤 자리에 바로 앉으며 오랜 친구 대하듯 말했다.
“구강왕께서는 무슨 당치않은 말씀이오? 이제라도 찾아주니 과인은 그저 고맙고 반가울 따름이오. 허나 먼 길 오느라 고단하실 터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편히 쉬시오. 천하 일은 내일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한왕 앞을 물러나올 때만 해도 경포의 가슴은 후회와 비통으로 터질 듯했다. 그런데 한왕의 행궁을 나와 객사에 들고 보니 대접은 또 전혀 딴판이었다. 이미 경포가 올 줄 알고 있었던지 큰 부호의 집을 빌려 객사로 꾸몄는데, 그 집의 크고 으리으리함이 한왕의 행궁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객사 뜰 앞에 세워져 있는 마차나 집안에서 시중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격식이나 차림이 한왕의 행궁에서 본 것과 다름없었다. 몸을 씻고 나자 내온 의복이나 차려진 음식들도 왕의 복색이요, 제후를 위한 진수성찬이었다. 거기다가 침실에서 미인까지 기다리자 경포는 비로소 마음속에서 후회와 비통을 털어냈다.
한편 경포가 돌아간 뒤 뒤늦게 소문을 듣고 달려온 장량이 한왕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글 이문열